“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결국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작가 찰스 디킨스의 그 유명한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혁명 당시의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을 무대로 격변하는 세상의 인물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 소설이 명작으로 더욱 유명해진 건 앞에 인용한 도입부 때문이다. 그렇다. 세상은 지혜와 어리석음·빛과 어둠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데, 이 나라의 지난 2개월이 꼭 그랬다. 10월10일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 이후 ‘K컬처의 승리’란 반응이 주를 이뤘다.
대중도 흥분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당시 못지않은 환호성도 터지고 서점가가 들썩였던 걸 이해 못 할 게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좌·우 두 진영 사이의 온도차를 무시 못 한다. 노벨문학상이 대한민국을 둘로 쪼갰다는 말까지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일테면 “문화에서 이룬 한강의 기적”이라며 한겨레신문이 흥분했지만(11월1일), 자유우파는 상대적으로 냉정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날카로운 불연속선이 노출됐다. 한강의 주요 작품은 물론 ‘기울어진 운동장’인 문단 전체에 동시에 존재하는 반국가적 성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급기야 한강 작품의 패륜과 외설문학 시비까지 벌어졌다. 터질 게 터진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 그리고 문화란 게 아름답고 고매한 그 무엇이며, 인문학적 성찰의 꽃이라 규정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문제일 수 있다.
태생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노벨평화상 못지않게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게 실은 문학 장르다. 가치와 가치·미학과 미학이 부딪칠 경우 전쟁터 못지않게 격렬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정치·경제·군사 등 하드파워보다 문화라는 소프트파워가 각광받는 시대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좌파가 문화 영역에 기어들어가 농간을 부려 왔다는 걸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 안에서 기동전·진지전을 벌이자는 이탈리아 공산당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 전략이 일례다.
한국 문단은 그런 변신을 위해 ‘잘 준비된 동네’였다. 실제로 문학은 현대사에서 특이한 길을 걸어 왔다. 1970년대 반독재 투쟁의 진원지였다가,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 전성기 때 그 무시무시한 민중문학·민족문학을 발전시켰다. 그걸 계기로 반(反)대한민국·친북 정서를 깊숙이 내면화했다. 그걸 백낙청의 창비 패거리가 이끌었지만 지금은 문단 전체가 그 지경이다. 소설가 이문열이 오래전 “문인의 90%가 좌파”라고 지적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당신이 잘 모르는 건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철학의 태풍이 불 때 문학 장르가 또 한 번 변신했다는 점이다. 당시 산업화에서 소외된 개인들의 피해의식을 키우는 동시에 은희경·전경린·신경숙·공지영 등 막 등단한 여성 작가들은 △가부장제 비판 △전통 가정 파괴 △페미니즘을 본격 태동시켰다. 이른바 문화 마르크시즘 수용을 시작한 것이다.
작가 한강은 그런 나쁜 문화의 DNA를 모두 갖고 있는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좀 더 글로벌하게 말하면, 한강은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시작한 정치적 올바름이라 불리는 PC주의를 작품 안에 구현했다. 그걸로 유럽 지식사회에 자기를 알렸고 끝내 노벨상을 거머쥐었다. 때문에 그 소식에 우리가 마냥 헬렐레할 수만은 없으며 한강 문학의 실체에 대한 정교한 규명이 필요하다.
분명한 건 한강의 문학은 반독재·반국가주의 성향에 페미니즘은 물론 문화 마르크시즘이 그 본령이다. 더욱이 특유의 유치한 스무 살 감성체 문장 안에 문학 독극물을 다량 집어넣고 있어서 더욱 걱정스럽다. 더 쉽게 말할까. 그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무책임한 평화와 사랑을 꿈꾸는 가수 존 레논의 ‘이매진’ 같은 세계다.
대중가요야 뭐 그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지만, 어쨌거나 책임있는 장르인 문학이 그러는 건 큰일이다. 더욱이 내부에는 반대한민국 성향을 품고 있으니 크게 경계할 일이다. 한강은 그런 걸로 덜컥 노벨상까지 받아 놓았으니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문학관을 바꾸기 힘들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한강의 문학은 우리가 알던 문학이 아니고 ‘문학의 이름으로 된 정치 투쟁’이라는 걸 우선 눈치채야 한다.
그걸 밝히는 작업에 필요한 영감을 어떻게 얻을까.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받아야 한다. 어차피 세상은 지혜와 어리석음, 빛과 어둠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우린 한강 문학에 스며든 어리석음과 어둠을 알아채고, 진정 우리가 원하는 새 문학의 지혜와 빛을 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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