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이란 혈통에 기반해 계승되는 것을 말한다. 성씨·신분·직업을 비롯해 국가 권력 및 자산, 회사·재단 등 법인체의 소유권과 경영권 등이 자녀 내지 자녀로 인정된 사람(양자)을 통해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혈통 이외의 것을 우선하면 세습에 해당하지 않는다.
동북아시아 역사상 어진 인물을 골라 권력을 물려주던 이른바 선양(禪讓)은 요·순 시대로 끝났다. 청동기 보급과 함께 진행된 고대국가 출현 이후엔 세습이 보편화됐으며 이는 20세기 중반 이래 주권재민 원칙과 헌법에 근거한 통치가 상식으로 자리잡기까지 약 3000년간 지속됐다.
고대·중세의 세습은 대부분 비슷했지만 일본 열도엔 여전히 한국에선 사라진 형태로 독특하게 살아 있기도 한다. 먼저 일본의 정치계 세습 문화를 살펴보자. 일본에서 세습 정치인이란 부모나 3촌 이내 친족으로부터 지역 기반의 일부 내지 전반을 물려받아 정계에 입문한 경우를 말한다. 한국에 세습 정치인이 5% 정도인 반면, 일본은 약 25%에 달하고 자민당만 보면 40% 가깝다고 한다. 일본의 정치계 명문가로 기시다(岸田)·아베(安倍)·아소(麻生)·고이즈미(小泉)·하토야마(鳩山)·고노(河野) 집안 등이 있다.
혼고 가즈토 도쿄대 교수는 “일본엔 역사적으로 평민의 입신출세 방편인 과거제 같은 게 없었고 섬나라 특성상 도망갈 데도 없으니 치열한 경쟁보다 출생으로 모든 게 납득되는 세습이 받아들여지기 쉬운 환경이었다”고 설명한다. 정승의 아들이라도 과거에 급제해야 벼슬길이 열리는 게 원칙이던 조선과 달리, 일본에선 12세기 후반 이래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 전까지 가마쿠라·무로마치·에도 막부(幕府) 등 약 700년 무사정권 내내 봉건 영주의 자리가 세습됐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세습 정치인의 출현에 대한 일본인들의 거부감 역시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다. 제법 비판이 있긴 하지만 한국보다 관대한 편이다. 일본의 한 정치평론가에 따르면 쇼와(1926~1989)시대의 총리대신(수상)은 대부분 정치가 출신이며 자수성가형 공직자였다. 대부분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생이라는 공통점도 눈에 띈다. 그런데 헤이세이(1990~2019) 때부터 2세·3세 의원 출신 총리가 하나 둘 나오더니 도쿄대 출신 1세대 정치인들이 격감하기 시작한다.
경제계 세습은 어떨까. 일본엔 생긴 지 1000년 이상 된 기업이 7개, 500년 이상 된 기업이 32개, 창립 역사가 200년 넘는 전 세계 기업들 중 절반 이상인 3146개 기업이 있다. 일본의 100년 기업은 대부분 가족 중심의 중소기업이긴 하지만 2만7000개나 된다. 근대사 자체가 짧아 100년 넘는 기업이 5개(두산·동화약품공업·경방·강원여객자동차·삼양사)뿐인 우리나라와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의 창업주가 일본으로 간 백제 사람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일본에서 절·신사(神社) 전문 건설팀으로 578년에 세워진 ‘곤고구미(金剛組)’는 1400년 된 회사인 셈이다. 아스카시대 사천왕사를 짓기 위해 쇼토쿠태자 요청으로 특별 파견된 세 사람의 백제인이 이 회사 시조였다. 그중 한 명인 유중광(柳重光)의 일본 이름 ‘곤고 시게미츠(金剛重光)’를 따서 회사명 곤고구미가 나온 것이다.
곤고구미는 2005년 경영 부진으로 다카마츠건설 산하로 합병됐다. 세계 최장수 기업조차 시대 변화 앞에 무력했나 보다. 일본의 장수 기업 가운데 52.1%가 후계자 부재로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몇 년 전 전해진 바 있다. 일본의 3대 재벌그룹 또한 창업자 성씨가 곧 기업명이듯 세습으로 지탱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금융을 주무른 미츠비시·미츠이·스미토모는 패전 직후 미 군정에 해체당했으나 재기했다. 그 후 금융업계의 야스다, 자동차업계의 도요타, 히타치제작소 구하라 집안 등을 들 수 있다.
전통예술 분야의 세습 현상도 빼놓을 수 없다. 전통극 가부키(歌舞伎) 출연진·제작진 70% 이상이 가업으로 대를 이어 종사해 온 사람들이다. 가부키는 에도시대 당시 등장 초기엔 가면 없이 다채로운 의상과 여성의 풍만한 신체 매력까지 선보이며 춤·노래를 제공하는 오락이었다. 그러나 남자 관객들이 자주 흥분해 풍기문란의 대명사가 되자 막부에서 금지령을 내렸다. 그후 여성 출연을 배제하고 연출에 절제를 더해 오늘날 같은 남성 배우 중심의 가부키로 발전했다.
스모(일본씨름)·장기·바둑·꽃꽂이 등의 분야에도 가업으로 대를 이은 경우가 많다. 세습이 단지 물질적·사회적 특혜로 이어진다면 불공정·불합리하지만 특별한 재능과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할 분야에서 세습은 오히려 경쟁력을 발휘한다. 일본이 한때 비서구권 최고 우등생일 수 있었던 것도 세습 전통의 긍정적 효과와 무관치 않다는 평가가 있다. 각종 기술·노하우 등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가업으로 전해지면서 서구 근대문명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일본의 강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다만 21세기 첨단기술과 미디어 환경, 더 빠르고 투명하며 더 촘촘히 연결된 세상에선 혈연보다 능력주의·민주적 합의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아날로그적 일본의 세습 전통이 흔들리는 가운데 디지털에 강한 한국이 한층 역전할 기회를 맞이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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