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10일,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 게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탄두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김대중이 전 세계를 상대로 어떻게 가짜 평화를 만들어 노벨상 사기극을 벌였는지, 어떻게 노벨평화상과 핵무기를 뒷거래했는지…. 양심 증언으로 미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락받은 유일한 한국인 김기삼 변호사와 한반도 전문 국제 저널리스트 도널드 커크가 밝히는 아찔하고도 끔찍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편집자 주]

북한 불법 지원 혐의 DJ 죽음과 함께 묻혀
이처럼 북한 정권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대중(DJ)의 엄청난 호의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에 대한 핵무기의 악몽을 만들어 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북한에 제공된 대부분의 자금은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전용되고, 또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자금은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를 통해 김정일 일가 및 그의 총애를 받는 권력 엘리트들의 호화 생활을 위한 비용으로 지출된 것으로도 보인다.
이제까지 북한에 불법으로 지원한 자금 규모와 그것의 전용 의혹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이 채 안 되는 동안, 노무현이 가족들의 부패 혐의를 조사하는 와중에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이어서 DJ가 노환으로 병사하면서 이 문제는 그대로 역사에 묻혀 버렸다.
DJ가 준 5∼15얼 달러, 북한 핵개발에 기여
그렇다면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겠다. 2000년 6월 정상회담의 대가로 5억 달러 또는 15억 달러가 북한에 전달되지 않았다면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DJ 정권에서 북한에 그처럼 퍼주기를 하지 않았다면 북한이 현재와 같은 수준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 능력을 보유할 수 있었을까. 이 점에서 우리는 DJ가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 능력 강화에 분명한 기여를 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 그리고 2013년 2월 북한의 핵실험이 비록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다고 해도 북한은 지속적으로 관련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DJ의 도움으로 북한은 자신들의 단계적인 목표 달성 시기를 앞당겼다는 사실이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 부시 행정부
김정일이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에 따른 과실을 즐기고 있는 동안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핵무기 개발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부시 행정부가 상정하고 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중동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이었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높이는 북한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현금 제공에 미국 정부는 반대하고 있었다. 부시는 2001년 3월 기자들 앞에서 DJ를 ‘This man(이 친구)’이라고 지칭했다. 이러한 외교 참사가 있고 나서 한국과 미국의 외교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2001년 DJ‧부시 간 한미정상회담은 ‘재앙’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의 대북정책에 대해 언급하며 미국과 엇박자를 낸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한국 고위 외교관으로서 겪은 고충을 털어놨다. 2001년 외무부 차관 시절 백악관에서 열린 김대중-조지 부시 간 한미정상회담을 반 총장은 한마디로 ‘재앙’이라고 요약했다.
반 총장은 회고록에서 이제 막 정권을 잡은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송두리째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을 때였는데 DJ가 성급하게 부시 행정부에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속하라고 압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당시 정상회담이 대실패로 끝나자 DJ는 외무부의 대표적인 미국통인 반 차관에게 엄청 화를 냈고 반기문은 차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DJ의 햇볕정책 이어받아 미 정부와 대립한 노무현정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한‧미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 인사들은 노무현과 그 측근들을 ‘탈레반’, 그리고 한국인들을 ‘달아난 신부’라고 표현했다. 이들이 처음 제대로 충돌한 것은 2005년 11월17일 경주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였다.
당시 부시는 다음 날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협력기구(APE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상은 북한의 불법 자금줄인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제재 해제를 놓고 대립했다. 당시 버시 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역대 최악의 한미정상회담이었다고 이 회담을 평가했다. 이 같은 한미 간의 불협화음은 2007년 9월 시드니에서 열린 APEC 총회에서도 이어졌다.
부시와 노무현의 기자회견에 배석했던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당시 상황을 ‘노무현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erratic nature)을 보여준 사건’이라며“그는 당시 상황이 얼마나 이상했는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고 자서전에서 혹평했다.
퇴임 후 ‘햇볕정책’을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DJ
후임자인 노무현이 김대중의 햇볕정책 끝자락을 잡고 쫓아가던 당시 DJ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2004년 중반 파이낸셜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DJ는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현금을 제공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자 형이 가난한 동생을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우리는 1억 달러 정도를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가능한 합법적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북한이 현대그룹 측과 협의해 사업 개발 대가로 1억 달러를 산업은행 비밀 대출을 통해 지원했다. 내가 그것을 승인했으며 그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결국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를 향상시켰으며 군사적 위협을 감소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DJ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아예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경향신문이 창간 58주년을 맞아 DJ와 인터뷰했을 때도 그는 비슷한 논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도 남북정상회담에서 모든 것에 대해 평화적 해결을 원한다고 했다. 실제 북한은 지금 전쟁할 능력도, 전쟁할 의사도 없다. 북한에게 핵은 수단이고,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미국 핵 앞에서 북한의 핵은 장난감도 아니다.”
DJ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북한의 비확산조약 탈퇴 원인” 주장
그로부터 2년 후인 2006년 10월 북한의 첫 핵실험이 있은 지 5일 후 DJ는 CBS와의 대담에서 여전히 부시 정부가 햇볕정책을 비판한 데 대해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바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미국과 대화를 하기 위한 수단이며, 위협을 받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제재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DJ는 국제원자력기구 등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압력은 북한의 비확산조약 탈퇴라는 부작용만을 초래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2년 후인 2008년 DJ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 핵 문제 있어 평화적인 협상을 하지 않고 5‧6년이라는 시간만 허비했다고 비난했다.
DJ와 김정일 사망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의문점들
이렇게 악화된 한‧미 관계는 2008년 2월 이명박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 김대중이 세상을 떠나고, 2011년 12월 김정일까지 사망하면서 수많은 의문점들은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역사의 무대 아래 묻혀 갔다.
DJ는 어떻게 화해와 평화의 이름으로 자신의 영광에 대한 욕망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노벨상 수상이 그 권위를 넘어 대다수 사람에게 작은 혜택이라도 주리라고 여겼을까. DJ는 해외 체류 기간 그에게 아부하던 교수‧유명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는 정말 노벨상 수상이 자신을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남‧북한의 미래 세대는 엄청난 돈을 주고 개최한 정상회담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도널드 커크 Donald Kirk
△미 프린스턴 대학 졸업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시카고 트리뷴지(Chicago Tribune)·프랑스 파리의 IHT(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를 비롯해 50년간 한반도 문제 전문 최고령 현역 기자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