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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와 북한의 대남공작 비록(祕錄)
[김동식 기획연재]<4> 김정일이 정예요원 직접 선발… 테러·암살팀 양성
김동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14 06:30:56
 
▲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중앙당 대남공작 실권자로 등장한 허담
 
김정일은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로 남한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그 책임을 물어 중앙당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었던 김중린을 1983년 말 해임하고, 그 자리에 당시 정무원 외교부장(현재의 내각 외무상)으로 일하고 있던 허담을 승진 임명했다.
 
허담은 김일성에게 고종사촌 매제였고 김정일에게는 오촌벌되는 인척이었다. 허담의 처 김정숙이 김일성의 고모 김형실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정일에게  허담은 오촌고모부, 즉 내종숙부(內從叔父)가 되는 셈이다.
 
남자 형제가 없어서 그랬는지 김정일은 허담을 친형제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은 김정일이 허담의 개인 수첩에 “너는 허담! 나는 정일!”이라고 친필 사인을 해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980년대 북한에서 유행했던 ‘조선의 별’이란 영화에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동료인 김혁의 수첩에 “너는 김혁! 나는 성주!”라는 문구를 써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정일이 그것을 모방한 것을 보면 영화를 현실로 착각했던 듯하다.
 
아무튼 허담이 사망할 때까지 그에 대한 김정일의 믿음과 신뢰는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는 것이 가까이에서 그들의 관계를 지켜본 고위간부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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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과 허담의 관계가 얼마나 가깝고 각별했는가를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가 있어 소개한다. 허담이 중앙당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에 취임한 후 김정일은 허담에게 통일전선부는 물론 중앙당 3개 대남공작부서, 즉 연락부·작전부·대외정보조사부까지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종전 대남비서 겸 통전부장이었던 김중린에게도 부여하지 않았던 권한이다.
 
이에 따라 허담은 중앙당 대남공작부서 4개를 모두 관장했는데, 당시 연락부 소속 공작원들이 격술 훈련과 자동차·오토바이 운전연습을 전문으로 하는 ‘719종합훈련장’을 방문한 바 있다. 719종합훈련장은 1980년대 초반 평양시 순안 구역에 위치한 초대소 지역 내에 새로 지었는데, 실내체육관에는 당시로서는 최신식 헬스기구들을 갖춰 놓고 체력 단련과 격술 훈련을 하도록 해 놓았다. 그리고 태권도 공인 유단자를 사범으로 선발해 체력 단련과 격술 훈련을 지도하도록 했다. 또한 운전교관 지도하에 일본에서 생산한 토요타·닛산 승용차와 스포츠실용차(SUV)·혼다와 야마하 오토바이, 그리고 독일제 벤츠 승용차 등을 가져다 놓고 운전연습을 하도록 했다.
 
허담이 당시 중앙당 연락부장이었던 정경희와 훈련담당 강모 부부장 등 고위간부들과 함께 719종합훈련장을 돌아본 후 그곳을 담당하는 연락부 교육훈련 담당과 엄모 부과장에게 “혹시 공작원들 훈련시키는 데 어려운 것이나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엄모 부과장은 나름 큰 맘 먹고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에서 해마다 수령님(김일성)께 드리는 충성의 편지 이어 달리기를 할 때 만경봉호에 수십 대의 오토바이를 싣고 와 평양시내를 한바퀴 돌고 편지를 전달한 다음 오토바이는 모두 그냥 놔두고 간다고 하는데, 그 오토바이 가운데 2대만 넘겨 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엄모 부과장으로부터 오토바이 2대가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허담은 그 내용을 수첩에 메모하면서 “오토바이 2대면 되겠느냐. 더 필요한 건 없느냐”고 재차 물었다. 이에 부과장은 오토바이 2대만 넘겨 줘도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토바이 2대만 있으면 된다”고 답변했다.
 
그 후 허담은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김정일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남파 공작원들이 훈련하는 데 오토바이 2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지난번 조총련에서 편지 전달 이어 달리기를 하면서 가져온 오토바이가 20여 대 되는데 이를 호위국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2대만 좀 가져다 쓰도록 해 주시면 좋겠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정일은 “허담 비서가 남파 공작원들의 훈련을 위해 필요하다는데 가져다 써야지. 내가 호위국에 얘기해 놓을 테니 필요한 만큼 몇 대라도 가져다 써라”고 흔쾌히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허담에게 요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산 야마하 오토바이 2대가 719종합훈련장에 전달되었고, 이것을 남파 공작원들의 오토바이 운전 연습에 사용하게 되었다. 다른 간부 같으면 보고서를 만든 다음 절차를 밟아 결제를 받아도 될까 말까한 일이 전화 한 통으로 곧바로 해결된 것인데, 이것만 보아도 당시 허담과 김정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을 경험하고 난 후 엄모 부과장은 “그럴 줄 알았으면 오토바이 2대가 아니라 10대쯤 보내 달라고 할걸”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한 바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은 필자가 1987년 여름 719종합훈련장에 들어가 1개월 동안 격술 훈련 및 운전 연습을 하면서 엄모 부과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인데, 당시 필자는 엄모 부과장의 제의를 받은 허담이 김정일의 허락을 받아 넘겨 주었다는 일본산 야마하 오토바이로 운전 훈련을 했다.
 
 
▲ 도쿄신문 2016년 1월1일자에 1990년대 후반 한국 권력 중심부에 정보망을 착근시키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지시에 따라 북한이 청와대 등에 공작원을 잠입시키기 위한 교육을 실시한 정황이 확인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연합뉴스
 
테러·암살 전문조직 창설한 김정일
 
김정일은 대남공작부서 책임자만 교체한 것이 아니라 중앙당 조사부와 인민군 정찰국 등 전반적인 대남공작기관에 대한 개편도 단행했다.
 
무엇보다 중앙당 조사부 내에서 남한 및 일본에 침투하는 공작원들에 대한 호송 안내와 유사 시 남진(南進)하는 북한 정규군의 길 안내 임무를 수행할 기능과 인원을 따로 떼내어 중앙당 작전부를 창설했다. 그리고 작전부장에는 공작선 선장 출신으로 대남 침투 경험이 많은 전 작전부 부부장 임호군을 승진 임명했다.
 
또한 조사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대외정보 수집과 위조화폐 유통 및 마약 거래를 통한 통치자금 확보 등 김정일의 특명을 수행하던 대외조사실을 따로 떼내어 ‘대외정보조사부’를 창설하고 테러와 납치의 주도자였던 허명욱을 대외정보조사부장으로 임명했다. 아울러 대외정보조사부는 다른 중앙당 공작부서들처럼 평양시 모란봉 구역에 있는 3호청사에 사무실을 두지 않고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김정일 집무실이 있는 노동당 본부청사에 그대로 두도록 했다.
 
이와 함께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을 테러하려다 실패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의 테러 및 암살 등 특수공작 임무는 새로 창설된 중앙당 대외정보조사부로 이관하도록 하고 이전에 조사부가 갖고 있던 일본 및 대남공작 관련 업무와 인원 등은 연락부로 이관하도록 했다.
 
김정일이 중앙당조사부를 작전부와 대외정보조사부 등 2개 부서로 분리하고 임무를 재조정한 이후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이때부터 대외정보조사부가 대남침투 요원 가운데 우수한 자들을 직접 선발해 테러 및 암살전문 요원으로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외정보조사부가 창설된 직후 허명욱은 곧바로 1984년 초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는 제18기 졸업생 가운데 두뇌 회전과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소수의 인원을 선발해 전문 테러팀을 새로 꾸렸다. 그리고 이들이 언제 어디서든 테러 및 암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키워 주기 위한 훈련을 강화하도록 했다.
 
1984년 당시 테러팀에 선발된 인원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제18기 졸업생 전명석 등 5명이었고, 그다음 해인 1985년에 필자와 함께 졸업한 제19기 동기생들 중에서도 선우철·정명철 등 6명이 테러팀에 선발된 것으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이후에도 해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생 가운데 5명 내외의 인원을 테러팀 멤버로 선발해 영어와 일본어 등 외국어 교육과 사제폭탄 제조·각종 저격무기 사격과 격술 등 테러 및 요인 암살에 필요한 각종 훈련을 혹독하게 시키는 등 임무 수행에 대비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1987년 11월 KAL기 폭파 사건도 김정일이 1984년 당시 대외정보 수집과 테러 및 요인암살을 위해 창설한 중앙당 대외정보조사부가 감행한 것이다.
 
아울러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을 백주에 독극물로 암살하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 역시 예전의 중앙당 대외정보조사부(2009년 북한군 정찰총국으로 이관) 테러팀 요원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6개월 만에 체포된 지도핵심간첩 정해권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대 초·중반은 연고자 중심의 대남공작에서 탈피해 공작원들을 지도핵심으로 양성한 다음 남파시켜 적구(敵區)에서 장기적으로 잠복해 활동하면서 반정부 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는 공작 전술로 전환하기 위해 준비하던 시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 연고자를 포섭해 만들어 놓은 지하당 조직들에 대한 지도와 검열 등 대남공작을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남한에 연고가 있는 남한 출신 공작원들을 남파해 예전부터 해 오던 연고선을 통한 지하당 구축 및 지도연락 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출신이지만 남한에 연고가 없는 공작원들·순수 북한 출신 공작원들을 지도핵심으로 양성해 남파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1983년 4월 검거된 정해권 간첩사건은 남한에 연고가 없는 남한 출신 공작원을 침투시켰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25 전쟁 당시 의용군에 입대해 북한으로 들어간 정해권은 대학을 졸업하고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68년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되어 1년 동안 대남침투 및 공작에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75년 1차로 국내에 침투해 군사시설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복귀하는 등 대남공작에 성공한 정해권은 1976년 김정일이 제시한 지도핵심육성 방침에 따라 지도핵심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
 
이후 1977~81년 초대소에 수용되어 각종 사상교육과 함께 대남침투 및 장기잠복 공작에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아울러 합법적인 신분위장 및 남한 생활 적응을 위해서는 직업 기술이 필요하다며 건설현장에 나가 목공 기술도 몸소 익혔다. 그리고 남한 사회와 시장경제 체제를 체험하는 차원에서 남한과 생활 환경이 비슷했던 마카오로 해외 실습도 다녀왔다.
 
이 같은 공작 교육과 훈련을 마친 정해권은 1982년 10월 공작선을 타고 전투원들의 안내를 받아 서해 공해상을 통해 경남 통영군 미금도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미금도로 침투한 다음에는 통영과 마산을 거쳐 대구로 이동한 후 대구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 약수암 인근에서 하숙을 했다.
 
당시 정해권이 북한 대남공작 지도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국내에 장기적으로 잠복해 활동하면서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하는 동시에 전투적이며 탄력성 있는 지하당 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첫 번째 임무는 1년~1년 반 동안 국내에 정착해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면서 그들로부터 본인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사회적 합법을 쟁취’한 후 나아가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호적을 취적함으로써 법적으로 완벽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것, 즉 ‘법적인 합법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임무는 노동자·농민·청년 학생 등 대남 혁명의 주력군에 속하는 계급·계층과 어울려 생활하면서 그들 가운데 반미·반정부 성향이 강하고 북한을 지지·동정하는 인물들을 찾아내고 그 역량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지지자·동정자 가운데 남조선혁명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사람들을 점찍어 놓았다가 혁명의 결정적 시기, 즉 남한에 북한노동당이 지배하는 체제가 수립되면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시를 받아 그들을 곧바로 노동당에 입당시켜 북한 체제를 위해 충성하도록 준비하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공작 임무였다.
 
대구에 잠입한 정해권은 부산에서 품을 팔러 온 목수로 위장하고 대구시내 건설현장에 취직해 건설 노동을 했다. 그는 하숙 생활을 하면서 평소에는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신정·설 등 명절 때는 고향에 다녀온다며 하숙을 나와 실제로는 서울과 부산 등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사회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 활동을 했다. 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에는 무전으로 생일 축하 및 충성을 맹세하는 축전을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해권의 거동이 이상한 점을 발견한 하숙집 대학생의 신고로 1983년 4월1일 하숙집에서 검거되었다.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년 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년 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 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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