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일본인 납치 직접 지시
공작선을 타고 북한으로 복귀한 신광수는 당시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인 김중린과 조사부장 이완기 및 일본공작과 간부들에게 자신이 처음으로 일본에 침투해 벌인 공작 활동 결과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일본에서의 공작 결과 보고를 마친 신광수는 평양 근교 초대소에서 3년 7개월간 간첩 밀봉교육을 받게 되었다.
신광수가 3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교육과 훈련을 받은 것은 그때가 김정일이 노동당 대남공작부서를 장악하려고 부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던 시기여서 모두가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신광수가 일본에 침투하기 전 원래 소속되었던 북한군 정찰국산하 198군부대는 그 사이에 중앙당 조사부에 편입되었다.
그 후 신광수는 노동당 대남공작부서들이 모여 있는 3호청사에 들어가 김정일을 접견하고 그로부터 직접 공작 임무를 받았다. 그가 첫 번째로 일본에 침투해 벌인 공작 활동 성과가 상당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일은 신광수에게 “일본인을 납치해 북한으로 데려온 다음 그의 신원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완벽하게 일본인으로 변신한 상태에서 일본에 들어가 공작 임무를 수행하라”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일본인을 납치해 그의 신분으로 완벽하게 위장해서 활동하라는 것이었다.
일본인 납치에 성공한 신광수
김정일로부터 일본인 납치 및 완벽한 신분 위장 임무를 받은 신광수는 공작금과 무전기·암호해독용 책자 등을 받아 가지고 1980년 4월 두 번째로 일본에 침투했다. 이번에는 원산항이 아닌 남포항에서 공작선을 타고 출발해 일본 미야자키현 해안으로 침투했다.
일본에 침투한 신광수는 1차 침투 시 포섭했던 조총련계 재일교포 은정웅의 주선으로 도쿄에 거처를 잡은 다음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오사카 상공회 회장 이길병(당시 73세)에 접근했다. 그리고 북한에 살고 있는 아들 2명의 사진과 자필 편지를 제시하면서 만약 협조하지 않으면 아들의 신상이 해롭게 된다고 협박하여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북한에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수립한 활동 계획대로 이길병과 예전에 포섭한 김길욱에게 납치 대상을 물색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신광수가 정해 준 납치 대상의 기준은 미혼이면서 연고 가족이 없는 남자, 여권을 한 번도 발급받지 않아 관공서에 인물 사진을 제출한 적이 없으며 전과 기록도 없고 지문 날인한 사실도 없는 자, 개인부채 등 금전 거래는 물론 은행 거래가 없는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장기간 행방불명되더라도 찾을 사람이 없고 노출될 위험이 없는 45~50세 일본인 남자를 물색하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1980년 6월 신광수는 이길병으로부터 기준에 부합하는 납치 대상을 찾아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납치 대상은 조총련 오사카상공회 이사장 이삼준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하라 다다아키(原勅晁·당시 44세)라는 일본인이었다.
신광수는 이길병·이삼준 등과 모의해 해안가 별장으로 휴가 가자는 구실로 하라 다다아키를 미야자키현 아오지마 해안까지 유인하기로 한 다음 무전 연락을 통해 북한 공작지도부에 계획을 보고했다.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신광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접선 일시와 장소를 정한 다음 공작선을 대기시키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납치 준비를 끝낸 신광수는 1980년 6월 중순 이길병·이준삼·김길욱 등과 합세해 하라 다다아키에게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며 바닷가로 놀러가자고 유인한 다음 미야자키현 아오지마 해수욕장 어린이놀이터 남쪽 끝 도랑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술을 먹였다. 그곳에는 북한에서 보낸 납치범 4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신광수는 납치범 4명을 도와 하라 다다아키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은 뒤 자루 속에 넣어 해안에 대기하고 있던 고무보트에 실었다. 그런 다음 공해상으로 이동해 그곳에 대기하던 공작선에 옮겨 싣고 자신도 그와 함께 북한으로 복귀했다.
일본인으로 둔갑한 신광수
납치한 하라 다다아키와 함께 북한으로 복귀한 신광수는 평양 근교 초대소에 5개월간 체류하면서 김정일의 지시대로 하라 다다아키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물론 그의 학력·경력, 가족 및 친척 관계, 거주지 이동 관계, 금전 관계 등을 면밀히 파악하여 숙지했다. 하라 다다아키가 중국음식점 요리사였던 점을 감안해 중국요리 기술까지 익혔다. 이렇게 해서 신광수는 완벽하게 ‘하라 다다아키’라는 일본인으로 둔갑했다.
1980년 11월 말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조사부 부부장 강해룡으로부터 “상당히 힘들게 해결한 합법 신분이니 위장 신분을 더욱 공고히 하고 완벽한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재일 공작을 더욱 강화하라”는 지시와 격려를 받은 후 세 번째로 일본에 침투하게 되었다. 신광수에게 임무를 준 중앙당 조사부 부부장 강해룡은 신상옥·최은희 씨 납치를 지휘한 인물이기도 하다.
신광수는 이번에도 예전처럼 남포항에서 공작선을 타고 출발했다. 침투 지역은 하라 다다아키를 납치했던 아오지마 해안이었다. 아오지마 해안을 통해 일본에 침투한 신광수는 먼저 하라 다다아키 납치에 가담한 이길병·김길욱·이삼준 등을 만나 “당신들은 하라 다다아키 납치 공작에 직접 가담한 장본인들로서 책임이 크니 비밀을 철저히 지켜라”고 강조했다.
그다음 그는 북한의 지령대로 도쿄에 거주하는 민단 간부 이동철을 포섭하기 위해 접근했다. 그런 다음 이동철에게 북한에 살고 있는 그의 숙부 이승규의 사진과 자필 편지를 보여주는 한편 이동철이 대학 재학 시 북한의 장학금을 받은 사실 등을 미끼로 약점을 공략해 포섭했으며 사업자금으로 3000만 엔을 지원하도록 협박과 회유를 병행했다.
1981년 들어서는 일본인으로 둔갑하기 위한 각종 신분증과 서류를 갖추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먼저 1981년 5월 이길병의 소개로 일본 당국의 각종 신분증 발행 절차와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방원정(당시 50세)을 접촉해 북한에 체류 중인 처남 김봉기의 편의를 잘 보장해주고 사업자금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회유하는 수법으로 그를 포섭했다.
그런 다음 방원정에게 부탁해 하라 다다아키 명의로 된 여권·운전면허증·인감등록증·국민건강보험증 등을 발급받도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광수는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급하는 신분증까지 모두 갖춘 ‘완벽한 일본인’으로 둔갑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인 하라 다다아키’로 성공적으로 둔갑한 신광수는 1982년 2월 포섭한 방원정을 데리고 도쿄 제국호텔로 가서 북한 무역대표단 일원으로 위장해 공작 검열차 일본을 방문한 중앙당 조사부 부부장 강해룡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강해룡은 방원정에게 “민단으로 위장 전향하여 남한 입국 여건을 조성하는 동시에 남한에 사는 동향인·동창·친척 가운데 영향력 있는 자를 포섭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신광수, 일본인 여권 가지고 수시로 일본에 침투
1982년 3월 북한 공작지도부의 소환 지시를 받은 신광수는 과거처럼 비밀리에 북한 공작선을 타고 일본 해안을 통해 침투하거나 복귀하지 않고 일본 정부가 공식 발행한 하라 다다아키 명의의 여권을 소지하고 합법적으로 여객기를 이용해 스위스·파리·모스크바 등을 거쳐 북한으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신광수는 공개적·합법적으로 아무 때나 마음대로 일본을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북한에 들어가서는 초대소에 체류하면서 정치사상 학습 등 사상 교육을 받고 김일성 생일 70주년 축하 행사에 참가해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은 후 두 번째로 김정일로부터 직접 공작 임무를 받았다.
김정일은 신광수에게 ‘일본인의 합법적인 신분을 활용해 동남아 거점을 조속히 확보하고 일본인 납치 사실이 노출되면 국제 문제로 비화될 것이니 관련 비밀을 철저히 지킬 것과 재일 하부망을 활용해 대남 침투 공작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 등을 지시했다.
1982년 5월 초 평양을 출발해 모스크바·파리·스위스 등을 역순으로 경유해 일본에 다시 침투한 신광수는 예전에 포섭한 이동철을 만나 무전기를 넘겨주고 무전기 작동법과 암호해독 교육을 실시하는 등 그가 독자적으로 북한과 연계 연락을 가지면서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울러 그에게 민단의 신임을 얻어 중앙본부 간부로 진출할 것과 민단 내부 정보를 수집해 보고할 것, 포섭 가능한 인물을 선정해 보고할 것 등을 지시했다.
방원정에게도 북한의 지령 수신 및 해독 방법 등을 교육하고 김포국제공항의 대공포 진지 배치 현황·현대조선소 위치 및 도크 규모·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현황 등을 보고받았다.
1983년 5월 복귀 지령을 받은 신광수는 하라 다다아키 명의의 여권을 소지하고 합법적으로 여객기를 이용해 북한으로 향했다. 도쿄 나리타공항을 출발한 신광수는 스위스 취리히·비엔나·모스크바를 경유해 평양 순안공항으로 입국했다.
북한에 복귀해서는 9월에 진행된 정권 수립 3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뒤 중앙당 조사부장 임호군으로부터 ‘방원정을 통해 예비역장교 이성수를 포섭할 것, 이동철을 민단 중앙본부에 침투시킨 후 대동 복귀할 것’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11월 초 평양을 출발해 다시 일본으로 침투했다.
일본에 입국한 신광수는 방원정으로부터 이성수 포섭 진척 상황과 위장 거점 운영 실태 등 그동안의 활동 결과를 보고받은 후 공작자금을 지원할 테니 이성수 포섭에 전력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조총련 나가노현 상공회장 정무진을 협박해 일화 4000만 엔을 헌금하도록 한 다음 방원정에게 이성수 포섭 자금으로 전달했다.
한편 신광수가 포섭한 방원정은 1984년 3월, 이동철은 같은 해 8월 각각 제3국을 경유해 북한에 입국한 후 간첩 밀봉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도 같은 해 3월 북한으로 들어가 10월까지 평양에 체류하면서 방원정과 이동철이 교육받고 있던 초대소를 방문해 공작 책임자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84년 10월 하순 중앙당 조사부장 임호군으로부터 ‘제3국에서 이성수와 본인(조사부장 임호군)이 직접 접선할 수 있도록 할 것, 동남아 거점을 구축해 젊은 공작원 4·5명이 일본에 침투할 수 있도록 양성할 것’ 등의 임무를 받고 평양을 출발해 베이징·카라치·방콕 등을 경유해 여섯 번째로 일본에 침투했다.
일본에 침투한 후에는 방원정에게 이성수와 노동당 조사부장 임호군과의 제3국 접선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준비를 잘 하라고 독려하고, 이동철에게는 민단 침투를 독촉했다. 그런 다음 공작 검열차 일본을 방문한 중앙당 조사부 간부를 만나 활동 상황을 보고하고 재일교포 한성익 등 5명의 조총련 상공인에게 접근해 북송 가족을 인질로 삼아 자금 헌납을 강요하는 등 공작 자금 조달을 획책했다.
1985년 1월 하순에는 방원정을 만나 이성수로부터 입수한 ‘팀스피리트-85’ 훈련 관련 정보를 전달받아 북한에 보고하고, 2월 초에는 한성익을 만나 일본 정부가 만든 정보 자료를 넘겨받아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이던 만경봉호 간부를 통해 북한에 보고했다.
1985년 2월 초에는 북한과 독자적으로 연계 연락을 주고받던 방원정으로부터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령 내용을 전달받았다.
방원정은 신광수에게 북한 공작지도부에서 ‘이성수를 통해 지속적으로 한국군 관련 각종 군사기밀을 수집해 보고하며, 이성수에게 팀스피리트-85 훈련 관련 정보를 수집한 노고를 치하할 것’ 등을 지시했다고 보고했다.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년 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년 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 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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