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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의 전라도에서] 봄이 오면 소생하는 할미꽃을 위하여
정재학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10 00:02:50
 
▲ 정재학 시인·칼럼니스트
언덕을 넘으면 멀리 개울 건너 외할머니가 보였다. 석양 빛을 받아 붉은 햇빛에 둘러싸인 외갓집 마을 앞 개울에서 우리는 만났다. 산도화가 핀 개울 언저리에 들어서면 할머니의 목소리가 물소리보다 먼저 징검다리를 건너왔고, 늙은 할미꽃은 어린 외손주에게 굽은 언덕 고갯길 같은 등을 내미는 것이었다.
 
좋아서, 외손주 엉덩이를 받친 손을 가끔씩 추어올리면서 길을 걸었지만, 개나리가 피다 간 길 언덕의 할미꽃처럼 할머니는 그렇게 다소곳한 분이셨다. 한없이 외로워 보였던 것은 항상 젖어 있던 할머니의 눈이었다.
 
인공(인민공화국) 난리가 지나간 들판에는 붉은 민둥산과 집단 생매장터가 밤이면 도깨비불을 일으키고 있었고, 아기를 물고 가는 늑대 이야기가 종종 들려왔다. 바람이 비명소리처럼 성산 골짜기를 내려올 때마다 할머니는 도깨비불처럼 떠돌고 있을 큰외삼촌의 넋을 걱정하셨다. 큰외삼촌의 제삿날이었다.
 
제삿날이면 항상 묵언(黙言) 같은 짙은 어둠이 마당에 깔렸다. 호롱불을 밝히고 시간이 되면 할머니는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을 걷었다. 혼이 들어오다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아들이 무사히 집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배고파서 돌아온 내 새끼, 많이 많이 먹거라.”
제상(祭床)을 차리는 손은 다시 치마를 잡고 눈물을 찍어 내고 있었다.
 
그런 날 밤이면 가슴앓이 같은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숨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할머니의 병환을 걱정했다. 그러나 외할머니 병에는 약이 없다고 했다. 가슴에 피가 맺히면 저렇게 된다고 사람들은 할머니의 실핏줄이 터진 두 눈을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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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도 기가 막혀 흐르지 못하면 둑을 넘듯이 할머니의 슬픔도 눈물로마저 흐르지 못하고 밖으로 터져 저렇게 붉어졌다고, 사람들은 가만가만 말하곤 했다.
 
여순반란이 일어나 반란군이 토벌되면서 살아남은 반란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 영광 불갑산 지구에도 야산대가 들끓었다. 사람들은 누가 좌익인지 누가 우익인지 알 길이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끌려다니고 있었다. 잘생기고 똑똑한 우리 큰외삼촌도 그 난리의 길목에서 휩쓸리고 있었다. 어느 날 광주로 피신했던 큰외삼촌이 먹을 것이 떨어져 돌아오자 그들이 잡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영광 성산 골짜기에서 큰외삼촌은 차가운 시신(屍身)으로 발견되었고, 죽은 아들을 붙들고 울던 할머니의 눈에선 실핏줄이 터졌다. 그렇게 슬픔은 붉은 눈으로 남아 항상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리곤 제삿날이나 명절이면 상에는 배고픈 내 새끼를 위해 그득그득 음식이 차려졌다.
 
그러다가 늙은 할미꽃은 짧은 봄을 보내고 그렇게도 그리던 자식 곁으로 떠났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친정 길을 허우적거리며 달려갔다. 어머니를 따라 언덕을 넘고 할머니 서 계시던 개울을 보았지만 외할머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서 계시던 그 자리에는 산복숭아 나무만 고개 숙여 꽃잎을 떨구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해마다 혼불처럼 아롱아롱 아지랑이 오르는 언덕에 할미꽃이 피는 봄이면, 우리는 할머니와 큰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외갓집 개울을 건넜었다. 그리고 세월을 따라 굽이굽이 굽어진 할머니의 등에 업히고 산도화 핀 마을로 들어서던 날…. 밤이 되어 왕생극락을 비는 할머니의 손길이 치마를 더듬어 눈물을 찍어 낼 때 성산 골짜기를 내려오던 바람소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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