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받게 된 종합판정 훈련
공작조를 편성한 지 1개월가량 되어 나와 김명걸은 종합판정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종합판정 훈련은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한 후 처음으로 함경북도 청진과 나남 지역에서 했던 비(非)합법 훈련과 반(反)합법 훈련, 훈련 종반에 진행한 100리 강행군과 사격·태권도 등과 같은 방법으로 했다. 훈련 지역이 평안남도 양덕과 함경남도 함흥으로 바뀌었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명걸이 종합판정 훈련에 처음으로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종합판정 훈련은 공작원 개개인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공작조가 편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공작원들이 각각 개인별로 참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김명걸은 처음으로 종합판정 훈련에 참가하는 데다 자신감도 없었는지 공작조 차원에서 훈련에 참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나와 같이 행동하게 되었다. 원래 모든 종목의 훈련을 혼자서 해내야 하는 종합판정 훈련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김명걸은 어떻게 하든 쉽게 훈련하려고 잔머리를 썼던 것이다.
종합판정 훈련이 처음인 조장과 함께 악천후 속 산악 행군
우리가 비합법 훈련을 했던 평안남도 양덕군 일대의 산은 북한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곳인데, 험한 산악지역에서의 비합법 훈련 마지막 날에 일이 발생했다. 원래 계획에는 훈련 마지막 날 밤에 산악 행군으로 양덕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아침 양덕역에서 열차를 타고 반합법 훈련 장소인 함흥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밤 많은 비와 짙은 안개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다 손전등에 들어가는 건전지까지 다 떨어져 지도를 전혀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산이 너무 험해 자칫 벼랑에서 떨어질 위험도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정해진 코스로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냥 다음 날 아침까지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양덕에서 열차를 타고 다음 훈련 장소인 함흥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훈련 담당 지도원들이 정해 준 코스를 따라 가든지, 아니면 훈련 코스를 주동적으로 변경시켜 일단 목적지까지 이동한 후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훈련을 차질 없이 실행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전자를 택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숙영을 하고 날이 밝은 다음 움직이면 될 것이지만, 후자를 택한다면 가던 방향을 바꾸어 산에서 내려간 뒤 밤새도록 걸어야 하므로 육체적으로는 힘이 드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전자보다 후자를 택하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한 방안이었다. 당시 훈련 일정은 하루 간격으로 여러 개의 공작조가 릴레이로 출발해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처럼 한다면 마지막 날 훈련은 물론 다음 공작조들까지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자를 택한다면 마지막 훈련은 약간의 차질이 생기더라도 다음 훈련이나 다른 공작조들은 모두 차질 없이 종합판정 훈련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며 조장으로서 빨리 결심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끝내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우리는 산꼭대기에서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양덕읍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양덕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훈련담당 지도원들은 정해 준 행군 코스를 이탈하더라도 날이 밝기 전에 왔어야 다음 훈련도 차질 없이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신분 노출하지 않고 모르는 여성의 신상 털기
그 후 함흥 시내에서 접선 및 무인포스트 매몰·발굴, 증명서 없이 열차승차권을 구매해 열차로 이동하거나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가 숙박하는 등의 반합법 훈련을 실시했다. 물론 나는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라 비교적 쉽게 훈련 내용을 소화해 냈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신분을 전혀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정해 주는 전혀 낯선 사람의 신원 정보를 파악해 오는 훈련이었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이 훈련을 할 때는 제약 조건이 있는데 본인의 신분을 공작원은 물론 당 간부나 보위부 또는 안전부(경찰) 요원으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함흥시 성천강 구역 당위원회 청사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훈련 담당 지도원이 만나고 돌려보내는 사람의 신상을 파악해 오는 것이었다.
내가 함흥시 성천강구역 당위원회 청사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훈련 담당 지도원이 50대 아주머니를 만나고 돌려보내면서 눈짓으로 그를 따라가 신상을 파악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신호대로 나는 아주머니를 미행해 그가 가는 곳까지 몰래 따라갔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부터 알아야 그의 신상을 파악할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함흥지함공장의 당비서 아주머니
약 20분가량 아주머니가 가는 곳까지 따라가니 마지막에 한 공장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정문 앞에서 뛰어놀던 어린 학생들에게 이곳이 무슨 공장인가를 물었는데 그중 한 아이가 ‘함흥지함공장’, 즉 종이박스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어서 내가 또다시 방금 들어간 아주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옆에 있던 아이가 당비서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단 내가 신원을 확인해야 할 임의의 여성이 함흥지함공장 초급당비서라는 정도까지 파악한 후 구체적인 신상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나는 사로청 간부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까지 사로청 간부를 역임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어떤 대화를 해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로청 지도원·‘노동청년’ 기자로 위장, 임무 수행
그래서 나는 일단 사로청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 금성정치대학을 졸업한 후 함경남도 사로청위원회에 배치받은 지도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함흥지함공장 사로청위원장을 만나 사로청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적당한 틈을 봐서 당비서의 신상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으로 그 아주머니의 성명과 나이·집주소 등을 알아냈다.
그런 다음 북한의 대표적인 일간지 중의 하나인 ‘노동청년(현재는 청년전위)’ 기자로 위장해 취재를 구실로 당비서 아주머니의 집에 찾아가 그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부인인 당비서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훈련이 끝난 후 초대소에서 과장·지도원 등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훈련 결과를 결산했는데, 나는 훈련을 비교적 잘했다고 평가받았다.
적구화 교육… 검증된 공작원들의 마지막 과정
대학 졸업 후 3~4년간 기초교육 단계로부터 노동 단련 및 간부현실 체험과 초대소에서의 사상이론 및 실무 교육, 그리고 종합판정 훈련과 수영·잠수·통신 등 여러 단계의 어렵고 힘든 교육과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검증된 공작원들이 마지막으로 받는 것이 ‘적구화교육’이다.
한국 언론에서는 공작원들이 받는 적구화 교육을 ‘이남화 교육’이라고 하는데, 북한 공작부서에서는 대남 공작원들이 적지(敵地)인 남한의 말과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교육이라는 의미에서 ‘적구화(敵區化) 교육’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마디로 북한 사람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교육이 바로 적구화 교육이다.
사실 공작원에게 있어서 모든 교육·훈련 단계가 검증 과정의 연속이지만 공작원 교육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적구화 교육 단계까지 왔다고 해서 검증(테스트)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는 없다. 굳이 표현한다면 적구화 교육까지 받으면 일단 공작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내가 거친 여러 단계의 검증 과정 중 기초교육은 그 첫 단계로 앞으로 공작원으로서 임무를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해 담당 부서 입장에서 직접 판단하는 일종의 검증 성격을 띤 단계이고 이후 이어지는 나머지 과정 역시 실천을 통한 검증 단계이다.
따라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공작원양성반 과정을 이수하든 전투원양성반 과정을 졸업하든, 이와 같은 기초교육 과정을 마친 후 공작원으로 임명된 전체 인원 가운데 적구화 교육 과정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3~4년 동안 80% 이상의 공작원들이 제대(전역)해 집으로 가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적구화 교육을 받는 인원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
실제로 나와 같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전투원양성반 교육 과정을 졸업하고 연락부 공작원으로 임명되었던 인원은 총 6명이었고, 같은 시기에 공작원 교육 과정을 졸업한 공작원이 5명, 여기에 1년 선후배까지 합치면 대략 30명 정도였지만 2~4년 사이에 대부분 제대(전역)하고 마지막까지 공작원으로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3·4명에 불과했다. 이 중 1995년 당시 실제로 남파된 공작원은 나를 포함해서 2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10%도 안 되는 인원이 최종적으로 남아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물론 대남 공작을 하는 부서마다 구체적인 임무가 다르고 연락부 내에서도 해당 과들의 특성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검증 형식과 방법이 동일할 수는 없다.
필자가 여기에 언급한 것들은 중앙당 연락부(현재 문화교류국)에서도 대남공작전담과를 기준으로 얘기한 것이고, 앞서 내가 거친 검증 과정과 기간 역시 같은 과의 공작원이라고 해서 같은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나는 여러 계기를 통해 대남공작담당과의 과장·부부장 등 간부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키워 내려는 간부들의 의도로 남들이 받지 않은 교육 과정을 거친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같은 교육 과정이라도 상대적으로 더 힘들게 넘기기도 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께서 저와 동생에게 지난 삶에 대해 우리에게 직접 말해 주시기 전, 이미 발간된 아버지의 자서전을 엄마가 저희에게 건네주시며 “아버지의 이야기이니 먼저 읽어 보고 남은 궁금한 것들은 아버지께 직접 듣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의 삶이 반드시 진실로 남아 있어야 할 대한민국 분단 역사의 하나라는 것을 그 책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면서 자식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아버지 삶을 알려야겠다고 따로 계획하셨던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일이 발생해서도 안 되고 또 앞으로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자식들로부터 아버지의 삶이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신 적은 없으셨나요?
아버지 : 내가 너희 엄마와 결혼하고 너희들을 낳아 키우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너희들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아버지인 나의 존재와 과거에 대해 알려줄까에 대해 엄마와 함께 고민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어.
물론 북한을 떠나온 탈북인들 중에는 자식들에게 일부러 자기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숨기고 사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해. 그러다가 자식들이 성인이 돼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 좋고, 아니면 그냥 방치해 둔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나와 너희 엄마는 너희들에게 아버지인 나의 존재와 과거에 대해 반드시 알려 주는 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식에 대한 도리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어. 다만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떤 식으로 너희들에게 나의 존재와 과거를 알려 줄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고민이고 숙제였어.
나와 너희 엄마는 너희들이 너무 어렸을 때 내 존재와 과거를 알려 주면 괜히 위축되거나 자신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사춘기 때 알려 주면 방황하거나 엇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
결국 너희들이 너무 어릴 때는 알려 주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정도 자라서 스스로 생각할 나이가 되면 알려 주자고 엄마와 결론을 내렸지. 그러던 중 내가 2013년 자서전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출간할 때 엄마와 상의해 너희들이 중학교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아버지를 이해할 나이가 됐다고 판단하고 자연스럽게 너희들에게 알려 주되, 본인인 나보다는 엄마가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엄마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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