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파두르 부인은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미모와 지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1745년 루이 15세의 정식 후궁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두 번의 유산을 겪고 종국적으로는 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했다.
1751년부터 그녀는 건강이 쇠약해져 자주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왕의 곁을 지키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지략을 발휘해 왕의 정부를 뽑는 데 깊이 관여한 것이다. 그녀는 미덕이 부족한 어린 처녀들을 자신을 대신할 후궁으로 뽑아 왕의 총애를 오래 받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왕의 충성스러운 친구로 계속 남아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장관을 임명하고 해임하는 등 국정에 관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5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프로이센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왕을 몰아붙여 오스트리아를 지원했고, 그 결과 1756년부터 7년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빚더미에 앉았고 캐나다까지 잃었다. 결국 1763년 파리조약으로 7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프랑스는 굴욕을 당했고 위기에 처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왕실의 생활 방식, 잠재적 라이벌 및 왕의 자녀들로 구성된 반(反)퐁파두르파와의 끊임없는 싸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죽음 등으로 인해 그녀는 심신이 허약해져 있었다. 호흡기 및 심장 질환을 앓고 있던 그녀는 기관지염과 고열, 피를 토하는 기침으로 고생했다.
1764년 2월, 세나르 숲 근처의 슈아지(Choisy) 성에 머물고 있던 퐁파두르 부인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녀는 가슴이 막힌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루이 15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퐁파두르 부인에게 달려가기 위해 자신의 활동을 포기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왕은 베르사유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신들은 슈아지 성과 베르사유 궁을 오가며 퐁파두르 부인의 상태를 왕에게 보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때 그녀의 병세가 호전되는 듯했다. 그러나 4월7일, 베르사유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재발했다. 숨이 막히고 질식할 것 같은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끝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감지한 왕은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다. 공증인을 보내 유언장에 유언변경증서를 추가한 후 부인은 고해성사를 받으러 갔고 4월14·15일 오후 마지막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난 저녁 7시 반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시신은 들것에 실려 곧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겨졌다. 루이 14세 이후 왕이나 가족을 제외하고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죽음을 알리지 못하는 왕실의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루이 15세는 이를 깨고 자신의 동반자였던 이 여인의 시신을 궁전에 들이는 통 큰 결정을 내렸다.
퐁파두르 부인은 왕실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일한 정부였고 왕의 헌신적인 사랑을 끝까지 받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정적들조차도 마지막 고통스러운 몇 주를 잘 참다 간 그녀의 용기에 감탄했다. 볼테르는 “퐁파두르 부인의 죽음은 매우 슬프다. 나는 그녀에게 빚을 졌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녀를 애도한다. 걷지도 못하는 노인이 아직 살아 있는데, 화려한 경력을 쌓던 아름다운 여성이 마흔 두 살의 나이에 죽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수의로 덮인 그녀의 유해는 베르사유의 개인 저택인 레제르부아르 호텔(L'hôtel des Réservoirs)로 옮겨졌다. 이곳은 지붕이 있는 통로로 궁전과 연결되어 있었다. 퐁파두르 부인의 유해는 이곳에 이틀 동안 안치되었다가 4월17일 베르사유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국왕은 그녀의 장례식을 준비했지만 참석은 할 수 없었다.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발코니에서 장례 행렬을 지켜보던 루이 15세는 “이것이 20년 동안 친구였던 그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는 말을 했다. 퐁파두르 부인의 관이 지나는 동안 비가 내리자 왕은 “그녀가 여행을 떠나기 좋은 날씨가 아니네”라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신은 9살에 사망한 딸이 묻혀 있는 카퓌신 수녀원에 안치됐다. 이 수녀원은 1603년 9월 교황 바오로 5세가 ‘수난의 딸들’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파리의 대형 수녀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때 조폐국으로 변신해 지폐를 인쇄하다 1806년 평화의 거리(Rue de la paix)를 조성하면서 파괴되었다. 이때 퐁파두르 부인의 무덤은 다른 무덤들과 함께 카타콤으로 이장되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구전에 따르면 그녀는 오늘날 평화의 거리 3번지 근처에 누워 있다고 한다.
방돔 광장 바로 북쪽에 위치한 평화의 거리는 파리 2구의 중심부로 유명한 오페라 가르니에 기슭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의심할 여지없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중 하나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가수 자지(Zazie)가 평등주의 사회에 대한 열망을 ‘평화의 거리’ 노래로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이 장엄한 거리는 파리의 명망 있고 부유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까르띠에·반클리프 아펠·멜리오와 같은 고급 부티크와 주요 보석 상점·웨스트민스터 호텔·파크 하얏트와 같은 주요 호텔과 궁전이 자리하고 있어 햇살 좋은 날 어슬렁거리며 윈도우쇼핑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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