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대규모 정치 행사 ‘전국영웅대회’
1988년 가을 김정일은 평양에서 처음으로 ‘전국영웅대회’라는 대규모 정치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대회의 성격에 맞게 6·25 전쟁 또는 대남 침투 및 공작 과정에서 특출한 공적을 세웠거나 그에 준하는 공을 세운 공화국영웅들과 경제·과학·예술·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특별한 업적을 이룬 노력영웅들이 모두 참석했다. 김일성·김정일이 함께 회의에 참석해 영웅들과 기념 촬영을 하는 등 이들을 격려해 주었다.
당시 공화국영웅 및 노력영웅 칭호를 받고 전국영웅대회에 참가한 생존자들에게는 본인에게, 사망한 영웅의 경우에는 가족에게 김정일 명의로 선물을 주었다. 그런데 막상 그 선물이 여러 사람에게 실망을 안기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나처럼 대남 침투 및 공작 분야에서 항상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하는 대남 요원들에게는 특히 더 크나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사망한 사람 유가족에겐 차별해서 선물 수여
살아서 영웅대회에 참석한 영웅들과 어떤 이유로든 사망해서 참가하지 못한 영웅들을 차별해서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국영웅대회에 참석한 영웅에게는 컬러 TV를 선물로 주고, 희생된 후 자식에게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거나 영웅 칭호를 받은 후에 사망한 유가족에게는 흑백 TV가 선물로 전달된 것이다. 물론 영웅 칭호를 받은 후에 병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의 유가족 중엔 죽은 사람 덕분에 선물을 받게 되었으니 죽은 사람들까지 잊지 않고 선물을 준다며 감사해 하고 좋아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앞으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당사자들, 특히 대남 요원들과 함께 자기 남편이나 부모가 희생된 대가로 영웅 칭호를 받은 유가족들의 생각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선물로 받게 된 TV가 칼라냐 흑백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희생된 사람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들 실망시킨 처사
무릇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는 것은 결코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게 아니다. 이 세상에 죽는 것이 좋아서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살려고 하지 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겠는가.
인간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한마디로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위해서이고, 나아가 살아 있는 사람들과 후대들을 위해서다. 그런데 누가 목숨을 바친 사람을 그렇게 홀대하고 차별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명을 서슴없이 바치겠다고 할까. 또 이미 희생된 사람의 자식들이 자라면 자기 부모처럼 죽음도 불사하고 일을 하겠다고 하겠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나 역시 항상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대남 공작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떤 명예와 보수를 바라거나 누군가의 강요에 못이겨 일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떳떳하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 죽은 사람을 소홀히 할 수밖에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고 그 선물을 주자고 정책을 입안한 사람도 다름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자기는 안 가지고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만 주자고 할 것이며, 그것도 좋은 것으로 주자고 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 정책 입안자가 희생된 영웅의 유가족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만약 진심으로 죽은 영웅의 유가족에게 생존해 있는 영웅에 대해서보다 더 좋은 것을 주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성인군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당시 북한 고위층에 성인군자 같은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죽은 아빠는 흑백, 살아 있는 자식은 컬러 TV
위와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있다.
1985년 가을 남파되었다가 1987년 말경에 복귀해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박모 공작원의 경우 본인도 영웅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역시 과거에 남파되었다가 희생된 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아 결국은 부자(父子) 모두 공화국영웅이었다.
박모 공작원은 당연히 살아서 영웅대회에 참가했으므로 컬러 TV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사망한 남편을 대신해 받은 흑백 TV를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아들이 받아 온 컬러 TV를 보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죽은 양반이 살아 있는 개만 못하다”
그래서 박모 공작원은 자기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어머니를 보기가 너무도 죄송스러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어머니 손을 붙잡고 “죽은 양반이 살아 있는 개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북한 당국이 그런 식으로 살아 있는 영웅과 죽은 영웅을 차별해서 선물을 준 것은 누구의 발상이었지 몰라도 이유 불문하고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당시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예 선물을 주지 말든지, 주려고 했다면 똑같은 것을 주어야 했다. 오히려 죽은 영웅의 유가족에게도 줄 거면 살아 있는 영웅에게 주는 것보다 더 좋고 값비싼 선물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은 당사자인 박모 공작원이나 나를 비롯한 일부 공작원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내놓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항상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모든 대남 부문 종사자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었고 또한 유가족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웅대회 참가자들이 받은 선물 품목이 그대로 중앙당 지도원이상 고위 간부들에게도 전달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역시 ‘죽은 양반이 살아있는 개만 못하다’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전국영웅대회가 끝난 후 대남 공작원들 사이에선 선물 수여와 관련해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과 함께 “이래 가지고서는 일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영웅이라는 것도 살아서 돼야지 죽어서 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공작원들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가라앉고 사기도 저하되었던 적이 있다.
대남공작원들에게 부정적 영향 준 영웅대회
이와 비슷한 의견은 영웅대회를 전후로 해서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그때마다 대남 공작원들에게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영웅대회가 있기 전에 있은 일이기는 하지만, 1987년에는 김일성 생일 75주년을 기념해 ‘영광의 노래’라는 음악·무용 종합 공연이 있었다. 이때도 거기에 참가한 유치원 아이들에게까지 국기훈장을 수여하고 칼라 TV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로 인해 탄광이나 광산에서 수십 년간 힘든 노동을 해 온 노동자들이 불만을 터뜨렸던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어느 곳이든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대폭적인 공작원 축소, 공작원을 그만두려는 생각도…
한편, 1987~88년 거의 절반에 달하는 중앙당 연락부 공작원들이 제대(해임)되어 사회로 배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와 함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19기 동기생들도 모두 제대해서 일부는 노동당 간부가 되었고, 일부는 김일성종합대학에 편입해 다시 대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나도 이듬해인 1989년까지 내 신변에 별다른 변화가 없으면 스스로 공작원을 그만두고 다른 친구들처럼 김일성종합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더 하든지, 아니면 사회에 나가 일반인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 전에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이 시기에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는 없었지만, 왠지 정말 이때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생각은 그 후에도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1차로 남한에 침투했다가 복귀한 후 부부장 등 간부들에게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적도 있다.
그랬더니 담당 간부들은 꼭 사회 일반대학에 가야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앞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면서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그래서 나도 앞으로 기회가 되면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정도로 적당한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시절 가장 많이 한 운동이 격술이라고 하셨는데, 그 외에 다른 스포츠를 즐긴 적은 없나요? 격투기를 전문적으로 배우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이 다른 스포츠를 한다면 어떤 종목을 즐기는지 궁금해요.
아버지 : 네가 말한 것처럼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운동은 격술이야. 격술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태권도와 일본의 가라데, 유도와 합기도, 기합술과 호신술, 잡기까지 모두 혼합한 종합무술이라고 할 수 있어. 요즘 사람들이 즐겨 보는 종합격투기 대회 UFC와 거의 유사하다고 보면 돼.
그런데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도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일반 스포츠 종목을 가지고 중대별 체육 경기를 하기는 해. 대체로 축구·배구·농구 등 3가지 구기종목 경기를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으면서도 살벌하게 진행되는 경기가 축구 경기야.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축구 경기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축구 경기에서 헤딩이 아예 없다는 거야. 축구 경기 중 공이 높이 뜨면 헤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는 공이 높이 뜨면 헤딩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점프를 높이 해서 발로 공을 차는 거야. 그러다 보니 높이 뜬 공에 머리를 갖다 대려 하다가는 상대방의 발차기에 제대로 머리를 맞을 수 있어. 그래서 축구할 때 아예 헤딩이라는 것이 없어.
다른 하나는 축구 경기 할 때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 때문에 반드시 다리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치는 친구가 생긴다는 거야.
특히 내가 속했던 특공대반 친구들은 축구에서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반 학생들 가운데 축구를 특별히 잘하는 친구가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친구부터 부상을 입혀 축구장 밖으로 쫓아낸 다음 경기하거든. 그래서 다른 반 친구들 가운데 축구를 특별히 잘하는 친구는 다리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아. 그렇지 않으면 특공대반 친구들이 워낙 과격하게 축구 경기에 임하기 때문에 다른 반 친구들이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갖고 있는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고 경기에서 패하는 경우가 많지.
반면에 농구나 배구 경기는 인기도 별로 없고, 그래서 축구처럼 살벌하게 하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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