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서울올림픽에 대응해 북한은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
1989년 7월 초에는 대한민국이 개최한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해 북한이 개최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평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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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기장에서 개최된 축전 개·폐막식 행사에는 김일성·김정일이 모두 참석했다. 대남 침투 및 공작을 준비하고 있던 나와 권중현은 김일성·김정일이 참석해 진행한 개·폐막식에 초대되어 행사 전 과정을 관람했다.
아직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폐막식 행사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북한 대학생들의 인기를 끈 임수경
임수경은 세계 각국 청년 대표들이 입장할 때 남한 청년 학생 대표로서 전대협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앞세우고 입장했다. 그는 입장하다가 김일성·김정일이 자리 잡고 있던 주석단(단상)에 이르자 걸음을 멈춘 다음 90도 각도로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해 관중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에 김일성·김정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임수경에게 박수를 치며 답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에서 미리 준비한 연설문 없이 즉석에서 연설하는 모습은 북한 주민들과 대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한 대학생들은 임수경이 미리 준비한 원고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 남한 대학생들이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한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두 번째 마카오 해외 실습
조장 권중현과 나는 사회문화부가 부활하는 등 대남공작부서가 개편되고 평양 5·1경기장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초대 손님 자격으로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실제적인 대남 침투 및 공작 임무 수행을 염두에 둔 액션플랜 작성과 각종 훈련을 소화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새로운 공작조를 편성한 뒤 대남 침투 준비에 여념이 없던 나와 권중현은 1989년 11월 하순~12월 초 2주에 걸쳐 마카오로 해외 실습을 다녀오게 되었다. 권중현은 해외 실습이 처음이었지만 나는 1년 전에 당시 조장이었던 김명걸과 마카오로 해외 실습을 다녀온 바 있어 두 번째였던 셈이다.
당시 부부장·과장 등 간부들은 해외 실습을 두 번씩 다녀오는 공작원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공작 부서가 내게 엄청난 혜택을 준 셈이다.
해외 실습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살아온 북한 출신 공작원들에게 자본주의 사회를 겉으로나마 체험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고 그것을 공작 활동에 활용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체험학습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작원들은 주로 마카오와 홍콩·태국·말레이시아 등에서 해외 실습을 했는데, 나는 이번에도 예전에 김명걸과 다녀온 바 있는 마카오로 갔다. 해외 실습에는 나와 권중현, 그리고 담당과의 이순섭 지도원 등 3명이 동행했다. 우리는 평양 순안공항에서 북한에 하나밖에 없는 국영항공사인 조선 민항 비행기 편으로 북경까지 이동했다.
비행기 트랩 앞까지 벤츠 승용차 타고 온 남녀
그런데 해외 실습을 위해 우리가 순안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려던 중 뜻밖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일행을 포함한 승객 전원이 비행기에 탑승해 기다리고 있는데 초록색 대형 벤츠 승용차가 비행기 트랩 앞까지 빠른 속도로 다가와 멈추는 것이었다. 국제선 비행기 앞에까지 대형 벤츠 승용차를 타고 들어올 정도라면 북한에서 살아온 나도 충분히 얼굴을 알 수 있는 최고위급 간부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내 생각이 크게 빗나갔다.
승용차 문이 열리고 거기서 내린 사람은 처음 보는 50대 초반의 남자와 30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다. 그들은 비행기에도 함께 탑승해 우리 바로 앞쪽 비즈니스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탑승을 마치자 곧바로 비행기가 출발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눈초리로 그들이 앉은 비즈니스석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조장 권중현과 담당 지도원을 향해 “도대체 어떤 특별한 사람들인데 비행기 앞에까지 승용차를 타고 와서 탑승하냐?”고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러자 권중현으로부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벤츠 승용차를 타고 비행기 앞에까지 와서 탑승한 50대 초반의 남자는 바로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이고, 그와 함께 온 30대 여성은 그의 기술서기(비서)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장성택이 1989년 여름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에 동남아나 유럽에 여행을 다녀오려고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처음 본 장성택… 특별하고 거침없는 행동
권중현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노동당 고위 간부를 역임했기 때문에 장성택을 잘 알고 있었고 담당 지도원 역시 중앙당 간부였기 때문에 장성택을 알고 있었다. 당시 장성택은 중앙당 청년사업부장으로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축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그 후 김정일의 신임을 얻어 중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임용되었다. 결국 나이 어리고 노동당 간부 경력이 없는 나 혼자만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장성택은 북경 공항에 도착해서도 입국심사대를 통과한 다음 곧바로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 고위 간부의 특별 영접을 받으며 벤츠 승용차를 타고 북한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나는 당시 장성택의 특별하고 거침없는 행동을 보면서 김씨 일가의 특권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두 번째 마카오 현장실습… 자본주의 사회 체험
우리도 북경공항에 도착해 북한 대사관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사회문화부 중국공작과 지도원의 안내를 받아 대사관 내 초대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중국민항 편으로 광주까지 갔다. 그리고 다음 날 곧바로 승용차 편으로 마카오에 갔다.
마카오에 도착한 일행은 일주일가량 호텔에 체류하면서 시장이나 슈퍼마켓·음식점·커피숍·교회·은행·카지노·택시·해수욕장·극장 등을 실제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관광과 쇼핑 등을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 방식과 사회 실상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1년 전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에로영화와 카지노 호텔에서 하는 스트립쇼도 관람했다.
당장 대남 침투 및 공작 임무 수행을 앞둔 우리 공작조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는지 두 번째 해외 실습을 갈 때는 1인당 2000달러를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어 일제 자동카메라와 시계·카세트 라디오 등 필요한 물건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마카오에서 광주로 돌아온 우리는 중앙당 사회문화부 중국공작과 김 부과장의 안내를 받아 시내 호텔에 체류하면서 시내 관광과 쇼핑을 했다.
그리고 다시 광주에서 북경까지 중국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북한 대사관에 며칠간 체류하면서 북경 주재 지도원의 안내를 받아 자금성과 천안문·만리장성과 이화원 등 관광지를 둘러본 후 북경-평양을 오가는 국제열차를 타고 꼬박 24시간 이동해 평양으로 돌아왔다.
1990년 4월, 추가로 내려온 대남 공작 임무
해외 실습을 다녀온 뒤 계속 실전 훈련을 하면서 대남 침투 준비를 하던 나와 권중현이 공작부서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시점은 1990년 2월과 4월이다.
공작 임무는 기본적으로 대남 침투 준비를 시작하면서 부여받기도 하지만, 침투 준비하는 과정에 추가로 전달받기도 하고 도중에 변경되기도 한다.
우리는 1990년 2월 초 대남 침투 및 국내 운동권 인물 포섭 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준비하는 과정에 다시 4월 초에 초대소를 찾아온 중앙당 사회문화부 이원국 부부장으로부터 추가적인 임무를 전달받았다.
당시 이원국 부부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공작 임무를 전달했다.
이선실 평양 복귀시키고 그가 포섭한 김부겸을 노동당 가입시켜라
“이번에 추가로 공작조에 부여된 임무까지 포함해 다시 공작조에 부여된 공작 임무를 종합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작조의 첫 번째 임무는 10년 전인 1980년부터 현재까지 남조선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북악산’을 접선해 대동 복귀하는 것입니다. 북악산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인 동시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입니다. 이 밖에 북악산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를 차후에 가져다줄 테니 그것을 보면서 확인하면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북악산으로부터 그가 전취(포섭)한 ‘백암산’을 넘겨받아 그를 입당시키는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지하당조직을 건설하고 본부와의 통신 연락 체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백암산은 현재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부겸으로, 그는 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며 서울대 재학 시절 운동권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백암산이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향후 그가 지하당조직을 구축하게 되면 해당 조직을 민중당을 지도하는 정당 지도부로 만들려고 합니다. 김부겸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 역시 우리가 가져다줄 테니 그것을 보면서 전술안을 작성하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원국 부부장은 75세의 이선실을 평양으로 데려오는 공작 임무는 그가 평생을 대남 혁명을 위해 헌신했으므로 여생을 편하게 보내도록 해 주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선실 복귀의 진짜 이유
그렇지만 당시 나는 북한이 이선실을 평양으로 데려가려 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선실의 대를 이어 간첩 활동을 할 자식이나 공작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선실의 자식 또는 다른 공작원이 이선실의 대를 이어 간첩 활동을 하면서 그가 사용하던 무전기 등 통신 장비 일체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면 북한으로서는 굳이 이선실을 평양까지 데려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선실의 대를 이어 간첩 활동을 할 사람이 없으므로 그가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다 사망하는 경우 그가 가지고 있던 무전기와 통신 조직표, 난수표와 변신용 책자 등 간첩 장비와 관련 자료들이 그대로 노출돼 그의 간첩 활동 전모가 세상에 알려질 위험성이 있었고, 따라서 이를 사전에 차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사전 조치가 바로 이선실을 북한으로 데려가는 동시에 그가 사용하던 무전기 등 공작 장비 일체를 없애 버리거나 가져가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 지도부가 이선실을 평양으로 데려가려고 한 것은 여생을 편하게 보내도록 해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사망할 것에 대비해 사전에 그의 간첩 활동 흔적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는 것이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북한은 김씨 일가가 3대째 독재를 하고 있는데, 4대째 그 집안에서 또 계승하게 되면 북한 주민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까요? 어떻게 단 한 번의 쿠데타나 저항 없이 시간이 지나도 복종하며 독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거죠?
아버지: 물론 김정은에 의한 3대 세습, 그리고 4대째 세습을 하더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북한 주민이 있을 거야. 그렇지만 지금도 겉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지, 김씨 일가의 3대 세습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불만을 갖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적지 않아. 그리고 김씨 체제에 반대하는 시도나 저항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야. 다만 사전에 노출돼 제압되었거나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없어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야.
중요한 것은 김씨 일가의 세습을 반대해 조직적인 쿠데타나 대규모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전에 제압되는 것은 북한의 통치시스템이 너무 강력하고 정교하기 때문이야. 체제나 정부를 반대하고 변화시키는 건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수많은 대중의 조직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어.
내가 노동당 간부를 하면서 보니까 북한이 경제는 엉망인데 주민 통제 및 감시 시스템만은 정말로 잘 되어 있었어. 아마 북한도 남한처럼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반체제·반정부 투쟁을 하는 경우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정도만 되어도 이미 북한 체제는 무너졌을 거야. 그런데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정부나 체제에 반대하는 움직임만 보여도 본인은 물론 자식·부모 3대에 걸쳐 무자비하게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내 사회와 영원히 격리시키고 있어.
그러니까 주민들이 김씨 일가 3대 세습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쿠데타나 저항 운동을 비롯해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투쟁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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