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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30] 헛된 희망, 부서지는 꿈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23 06:30:57
 
 
 
권지호는 전화를 끊고 희숙에게 환한 미소로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무슨 일이지?” 희숙은 할 말이 있으니 따로 만나자고 했다. 권지호는 흔쾌히 알겠다며 책상 위 달력을 꺼내 들었다. 희숙은 주말에 권지호와 조용한 곳에서 데이트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잉태된 아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권지호가 사 준 원피스를 입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원피스에 어울리는 겉옷이 마땅한 게 없지만 모아둔 월급으로 살 생각이었다. 그래도 권지호한테 임신 소식을 전하는 데이트인데 옷값으로 돈을 쓰는 건 사치가 아니었다.
 
희숙은 임신 소식을 어디서 전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야외로 나가자고 할까. 아니면 연대 앞 체르니에서 할까. 러브파크나 시티라이프는 너무 시끄럽고 산만했다. 그렇다고 패밀리 레스토랑은 연인의 임신 소식을 전하기엔 로맨틱하지 않은 분위기다. 좀 넉넉하게 점심시간에 만나서 이대 앞 가미 분식점에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멸치국수랑 주먹밥이 떠올랐다. 그러곤 오리지날 떡볶이랑 튀김 먹는 것을 상상했다. 이대 다닐 때 남자친구랑 가미 분식점도 가고 오리지날 떡볶이, 튀김도 먹고 싶었다. 가끔 힐을 신고 꽉 달라붙는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은 여대생들이 삼삼오오 팔짱 끼고 분식점 돌아다니며 수다 떠는 모습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변태섭은 이대 앞에서 만나는 걸 꺼려했다. 학교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옷 상점, 패션 잡화점들이 인민의 뇌를 망가뜨리는 자본주의 마약의 유혹과 같다고 했다. 대학교 앞에 책방 대신 온갖 어설픈 자본주의 찌꺼기들이 자리를 차지해 인간의 허영을 자극한다고, 거기에 놀아나선 안 된다고 했다.
 
권지호에겐 임신 소식만이 아니라 희숙의 정체도 고백할 생각이었다. 위장 취업한 것과 이화여대 다니다 한신대로 편입한 사실도 이야기할 참이었다. 위장 취업한 사실을 알면 기분 나쁠까. 아니다. 어쩌면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희숙이 권지호 집안과 차이 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어머님이 안 계신 것과 건사할 동생들, 손바닥만 한 양화점이 전부인 부산 갯가 출신이란 걸 고백해야 한다는 게 신경 쓰였다.
 
“이번 주 토요일 어때요? 주중엔 야근 때문에 힘들 것 같고 주말이 좋은데.” 권지호는 이번 주말에 지방 갈 일이 있다고 말했다. 희숙이 그럼, 다음 주 토요일은 어떠냐고 물었다. 권지호가 달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날은 내 결혼식인데? 희숙은 고장 난 시계처럼 동작을 멈췄다. 숨까지 멈췄다. 방심하다 철퇴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권지호는 태연했다. 그때, 독창회 했던 친구랑 결혼해. 그러니까 다음 주말도 안 되고…, 그다음 주말? 아, 주말은 앞으로 힘들겠다. 주중 아무 때나 말해 줘. 급한 내용 아니지? 하긴 우리 사이에 급한 내용이 있을 게 없지. 희숙은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진심이 아니어도 축하한다고, 서투른 연기로 화답했어야 했다. 만날 날도 정했어야 했다. 희숙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태섭의 아기인데 내가 왜 그랬을까.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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