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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33] 아! 희숙 선배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26 06:30:35
 
 
 
승연은 희숙이 자기 연인 변태섭에 대해 언급한 기억을 떠올렸다. 한 번 스치듯 지난 이름이었는데 기억났던 건 변태섭을 언급할 때 보였던, 온갖 존경과 모든 희열을 담은 희숙의 표정 때문이었다. 희숙이 우리 변태섭 씨가, 어쩌구 하는데 그처럼 맑고 경이에 찬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을 본 적 없지만 이름만큼은 승연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름이 변태스럽기도 했고.
 
희숙의 연락처는 의외로 쉽게 찾았다. 변태섭 사무실에 전화해 윤희숙을 찾았다. 무턱대고 사무실에 윤희숙을 바꿔 달라 했던 승연의 무대포가 통했다. 의외였던 건, 윤희숙을 찾는데 사무실 직원이 아, 사모님이요? 라고 응답한 것이었다. 세상에 동명이인과 결혼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싶어 자신이 찾고 있는 윤희숙이 맞을 거라 생각했다.
 
연락처를 남겨 놓았더니 희숙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알고 있는 학교 후배 오승연 씨가 맞습니까. 희숙의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희숙의 목소리를 듣는데 승연이 울컥했다. 알 수 없었다. 희숙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왜 목이 잠겼는지. 네, 맞아요. 제가 찾는 윤희숙 선배가 당신이라면 당신이 연락한 오승연도 제가 맞을 겁니다. 둘은 사연이 있는 사람들처럼, 헤어진 이산가족처럼 서로 존재를 확인하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침묵은, 살아온 삶의 무게만큼 무겁고 진지한 통한의 세월을 의미했으리라.
 
희숙을 못 알아볼 뻔했다. 올리비아 핫세 닮은 안경 쓴 단발머리 윤희숙은 온데간데없고 하얗게 센 머리칼에, 눈가 주름 가득한 중년의 볼품없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나마 그녀에게서 꼿꼿한 자존심마저 풍기지 않았더라면 승연이 젊은 날 흠모해 마지않았던, 운동권 여성 아이콘으로서의 존재감에 배신을 느꼈을 터였다. 찰랑찰랑했던 단발은 머리칼에 힘이 없어져 윤기 없고 푸석푸석한, 가을날 낟알 빠진 볏잎 같았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단발만 고수한 건 아니죠? 하나도 안 변했어요.”
 
승연의 인사가 겉치레란 걸 알았는지 희숙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너야말로 하나도 안 변했네. 나는, 염색하다가 지쳐서 그냥 놔둔 지 오래됐어. 승연이 비록 자기보다 두 살 어리긴 해도, 차이 나는 피부 상태에 윤희숙은 짐짓 위축된 듯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외적 자산의 유지 여부-어떻게 살아왔는지 가늠하는 기준이 된-로 시작되었다. 승연은 희숙에게 물어볼 말을 미리 머릿속에 정리한 상태였다. 기순이 죽은 거 아세요? 순간 희숙은 기순이가 누구지?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을 더듬는 동작이었다.
 
“너랑 같이 다니던 친구 맞지?” 승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 근데 어쩌다가…. 커피잔을 들던 희숙의 손이 떨렸다. 손의 떨림은 희숙의 불길한 예감을 암시하는 반응이었다. “전대협 발족 전, 아니 농활 갔다가 다른 학교 선배들한테 윤간당했어요. 여성성 해방 어쩌구 하면서 탈의하라 강요했고 기순이가 첫 타자로 벗었죠. 팬티만 남겨 두고 상의 탈의할 때까지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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