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만에 희숙이 보낸 편지와 물품이 도착했다. 편지봉투는 밀봉된 상태였다. 밀봉된 편지에선 통한의 세월을 혼자 견뎌야 했을 희숙의 삶처럼 엄숙함이 느껴졌다. 편지 겉면에 마태복음 11장28절 말씀이 적혀 있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승연은 심호흡 후, 편지 칼로 조심스레 편지봉투를 뜯었다.
승연아, 이런 편지를 쓰게 돼서 미안하구나. 네가 이 편지를 언제 받게 될지 모르지만, 네 손에 이 편지가 들려있을 때는 내가 무조건 하늘나라에 있는 건 확실해. 너한테 네 번째 주검으로 상처를 주게 돼서 유감이다.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자유에 대해 생각해 봤단다. 가난으로부터 자유, 억압으로부터 자유, 성으로부터 자유, 차별로부터 자유, 권위로부터 자유…. 내가 추구하고 쟁취할 자유였어. 그런데 지금 보니까, 난 어느 자유도 느끼지 못한 삶을 살고 있더라. 자유롭지 않은 삶조차 내가 선택한 것이었고. 그래서 지옥이었다고는 말하지 않으려고. 멈출 기회가 있었어.
난 그러지 않았지.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믿었거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것이라 했거든.
내 삶은, 변태섭을 만나고 변한 게 아니더라. 변한 건 하나도 없었어. 선택뿐이었지. 널 만난 후에 내 삶이 바뀐 거야. 무거운 짐 내려놓으라고 하나님이 널 보내신 거야. 내려놓기로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새털보다 가볍더라. 왜 진작 내려놓지 못했을까. 아버지 생각에, 동생들 생각에 결단하지 못한 건 핑계였어. 내가 그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건 내 착각이었어. 그들이 날 위해 희생한 걸 생각 못 했지.
내 가족이 나를 위해 참고 버텼던 나날이 더 이상 힘들지 않도록 그들의 손을 놓으려고 해. 그리고 나를 마지막으로 너를 괴롭히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기 바라. 네 외상, 내가 갚고 갈게. 억울한 희생은 기순이, 태주, 승연이 아버님으로 끝내야지. 여고 때부터 써 온 일기장이야. 내가 죽고 나서 남편이나 딸, 아버지가 볼까 봐 미리 밀봉한 채 부산 집으로 보냈어. 오승연한테 연락이 오면 전달해 달라고. 한 달 넘게 연락이 오지 않으면, 네 남편 사무실로 보내라 했는데 네가 직접 받길 기도하는 수밖에.
나, 하나님 만나러 갈게. 흥분되고 기대된다. 하나님이 용서하실까. 용서하실 거야. 공의의 하나님이시거든.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가도 반겨 주시고 위로해 주실 거야. 하나님도 날 외면하면 난, 갈 곳이 없어. 하늘나라 궁금하다. 승연아 잘 지내.
승연은 마지막 한 글자까지 읽고 나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슬픔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눈물이 아니라 피눈물이었다. 승연은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냈다. 더 이상 흐를 눈물이 없을 때까지 소리 내어 울었다. 다시는 울지 않을 거니까.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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