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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46] 제궤의혈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7-15 06:30:56
 
 
 
“김서희 작가시죠?” “네, 제가 김서희입니다.” 오승연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이유로 전화했는지,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내가 찜찜해 할 만한 것들을 먼저 설명했다. 그리고 만나서 전달할 것이 있으니 시간을 내 달라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일면식 없는 사람이 전화로 만나자 청했을 때 그러마, 하고 선뜻 응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렸고, 만나야 할 사람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테니 한나절 일정 정도는 비워 두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만나자면서 시간 할당까지 정하는 이상한 요청이었지만 나는 역시 또 선뜻 그러마, 대답했다. 일정표도 보지 않은 상태였고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는데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네, 충분히. 
 
약속 시각보다 일찍 나갔다. 누가 오승연일지 내기라도 한 것처럼 커피숍 입구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유심히 바라봤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베이지색 코트에 어깨까지 닿는 곱슬머리 여성이 들어섰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오승연임을 알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핏기 없는 하얀 피부였으나 나약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커피숍을 눈으로 한 바퀴 훑어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승연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내게로 또박또박 다가왔다. 목례가 아닌 정중례를 했는데 존중의 의미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나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고 오승연이 전달할 내용에 대한 존중이기도 했다. 오승연은 가방에서 내가 쓴 책을 꺼내 수줍은 표정으로 사인을 요청했다. 100만 부가 팔린 사회고발 소설 ‘용서하라, 모든 것을, 그가 죽은 다음에’였다. 의미 있게 읽었어요.
 
“통증이 느껴졌어요.” 핏기는 없지만 강단이 있는 목소리였다. 사람은 생긴 대로 말한다. 뚱뚱한 사람은 뚱뚱하게 말하고 못생긴 사람은 못생기게 말한다. 그녀는 생긴 것처럼 말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분노와 슬픔, 절망을 억제하고 담담해지기를 기다렸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오승연의 이야기는 빨라졌다 느려졌다 했다. 아마 기억에서의 비중일 것이다. 감정이 담길 부분에서 그녀는 몹시 자제했다. 그러나 오승연은 자신과 연관된 네 명의 죽음을 언급하는 부분에선 회한이 밀려왔는지 말을 편하게 잇지 못했다.
 
윤희숙을 이야기할 땐 그 증상이 더욱 심했다. 자신이 당한 일을 회상할 때보다 윤희숙의 증언을 전달할 때 그녀는 수시로 눈을 감았다. 윤희숙이 오승연을 고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그래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눈물 흘리는 게 망자들의 삶을 가볍게 만드는 행동이라 생각했는지, 눈물을 참고 버티는 모습은 차라리 애처로웠다.
 
오승연이 주문한 커피는 입 한 모금 대지 않은 채 식어 가고 있었다. 자리를 근처 내 집필실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커피숍 소음이 거슬렸다. 오승연의 사연이 공중으로 부유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불편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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