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州) 랭글리에 위치한 CIA 구 본부청사(OHB) 로비에 들어서면 왼편에 있는 전략정보국(OSS) 기념비 앞에 청동상이 우뚝 서 있다. 미국 최초의 현대적 정보기관인 OSS의 설립자이자 국장이었던 윌리엄 도노번(William J. Donovan)의 동상이다. 도노번은 ‘미국 정보의 아버지’, 파격적이며 저돌적인 리더라는 의미로 ‘와일드 빌(Wild Bill)'로도 불린다.
도노번의 생애
도노번은 1883년 새해 뉴욕주 버펄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아일랜드계였다. 나이아가라 대학교 법학과를 다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 편입해 1905년 졸업했다. 바로 로스쿨에 진학해 후에 제32대 미국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친교를 맺게 된다. 1907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1912년 뉴욕주 방위군에 입대해 기병 중대장이 되었고 해외 원정작전에 참가했다. 원정이 끝난 후 정식 육군 소속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원정군 예하 제42 보병 사단 165연대 1대대장이었다. 당시 동료 중에 더글러스 맥아더도 있다. 1918년 10월14일~15일 프랑스 랑드르에생조르주 인근의 전투로 공을 세워 명예 훈장을 받았다. 당시 중령이었던 도노번은 계급장을 드러낸 채 부하들 앞에 서서 "장군들이여, 나를 맞출 수 없다면 너희도 맞출 수 없다!"라고 외쳤다. 그 말과 함께 도노번은 부하들을 이끌고 독일군 진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부하들과 진지가 안전해질 때까지 전장에서 후송되기를 거부했다.
전후 러시아 내전에도 참가했고 군에서 전역해 1922년부터 1924년 뉴욕시 서부지검 검사와 검사장으로 근무했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법무부 형사국 차관보, 반독점국 차관보로 임명되어 근무했다. 당시 금주령을 위반한 인물들을 검거하는데 주력했고 그로 인해 살인 협박을 많이 받았음에도 법 집행을 계속해 언론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22년과 1932년 공화당 공천으로 뉴욕 주지사 선거에 2번이나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법무장관의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절친인 루스벨트의 선거를 돕기도 했다.
1940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으로 도노번은 영국 등 해외를 순방하면서 미국에 해외 정보를 수집할 중앙집중식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1941년 7월 11일 미국 정부는 정보조정관(COI) 직제를 신설하였다. 당시 육군, 해군, 연방수사국(FBI), 국무부 등에서 해외정보들이 따로 관리되고 있어서 통합 조정하는 부서와 직책이 필요했다. 당시 FBI 국장인 존 에드거 후버 등이 반대하였으나 루스벨트는 강행했고 정보조정관에 도노번을 임명했다.
도노번은 1941년 10월 정보조정관의 뉴욕 본부를 록펠러 센터 3603호에 개설하고 앨런 덜레스(1953-1961년 제5대 CIA 국장)에게 본부장을 맡겼다. 덜레스의 사무실은 영국 정보기관 MI6 뉴욕지부 사무실의 바로 위층이었다. 1942년 대령 계급으로 군에 복귀해 1942년 6월13일 창설된 전략정보국(OSS)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3월 육군 준장. 1944년 1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OSS의 활약과 도노번 국장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 정부는 정보 수집 및 배포 업무를 군과 외교정책 전문가에게 위임했다. 진주만 공습의 실패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1942년 6월13일 미국 최초의 현대적 정보기관인 전략정보국(OSS)이 설립되었다.
OSS의 정보분석 부서는 연합군의 승리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미국 최고의 인재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연합군의 폭격 작전에 대한 시의적절한 평가를 제공하고, 연합군이 참전 중인 국가들의 작전을 연구하며, 독일 점령을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이들은 서류, 전문, 보고서, 사진, 지도, 저널, 외신 및 기타 자료를 자세히 분석하여 핵심 정보의 대부분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도노번의 중앙 집중식 종합 분석 역량 비전을 입증했다. 이는 현대 정보 연구 및 분석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OSS는 적진 후방에서 미군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수많은 공작부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OSS와 명백한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즉 포로로 잡혀도 스파이로 사살당하지 않도록 군복을 입고 전투에 임했는데, 정예 특공대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였다. 외국어 능력은 필수적이었고 낙하산 강하, 상륙 작전, 스키, 등산, 무선 통신, 그리고 첩보 전술 등을 두루 겸비했다. 공작 부대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미얀마, 말레이시아, 그리고 중국에서 저항 세력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
OSS는 연합국의 준군사 세력과 연합하여 제드버러(Jedburgh) 팀을 구성하여 프랑스에 낙하산으로 잠입하여 독일 점령군에 맞선 저항 운동을 지원했다. 제드버러 팀은 2~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OSS 장교, 영국 장교, 자유 프랑스 장교 또는 사병, 그리고 때로는 벨기에, 네덜란드, 또는 캐나다 군인이 섞여 있었다. 1944년 여름 90개가 넘는 제드버러 팀이 프랑스에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무기와 물자의 공수 작전을 조율하고 독일군에 대한 기습 공격과 파괴 공작을 수행함으로써 노르망디 상륙 작전(암호명 오버로드작전)을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OSS 산하 101 파견대는 버마에서 카친족 원주민을 모집, 훈련, 지원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군 점령군과 싸웠다. 1944년 연합군이 버마를 공격했을 때 101 파견대는 기존 전투 부대보다 훨씬 앞서 진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소문을 퍼뜨리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격추된 연합군 비행기의 조종사를 구출하고 고립된 일본군 진지를 소탕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국을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OSS는 자유 태국(Free Thai) 운동을 전개했다. OSS는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가장 우수하고 똑똑한 태국 학생들을 훈련시켜 잠수함, 수상비행기, 낙하산, 그리고 도보 등을 통해 태국에 침투시켰다. 그들은 그곳에서 저항 세력과 접촉하여 일본군 배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포로로 잡힌 연합군 병사들을 구출하여 결국 일본의 항복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중국 측 대응 요원들은 작전에 대비하여 OSS 공작 그룹으로부터 낙하산 강하 기술에 대한 광범위한 훈련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과 미국 지휘관들이 활용할 수 있었던 최고의 정보는 울트라(ULTRA,독일)와 매직(MAGIC,일본) 프로그램을 통해 획득한 적의 메시지를 가로채 해독하여 분석하는 것이었다. 1943년 초 도노번은 귀중한 울트라(ULTRA)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정예 방첩부대인 X-2를 창설했다. X-2 요원들은 다른 OSS 요원들보다 더 엄격한 보안 관행을 준수했으며 울트라(ULTRA)를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이 비밀 정보를 바탕으로 X-2는 OSS 공작을 지원하고 혁신적인 방첩 활동을 개발했다.
OSS 활동은 적을 속이고 공격하고 사기를 저하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장치와 문서에 대한 꾸준한 수요를 창출했다. 도노번은 이미 개발된 수많은 영국의 정보 장비를 활용하여 OSS의 요구에 맞게 조정하고 비밀 임무에 필요한 추가 장치를 제작하는 자체 역량을 강화했다. OSS는 FBI, 국무부 등 타 기관들의 반발에 부딪혔지만, 군사, 외교, 그리고 비공식적인 은폐 활동을 통해 전 세계 정보 역량을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전성기에는 OSS에 13,000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근무했으며 그중 35%는 여성이었다. OSS는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전쟁 기간을 단축하고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인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주전장인 남태평양 일대는 맥아더의 견제를 받아 활동하지 못했고 존 에드거 후버의 반발에 중남미쪽에서도 활동하지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타개 이후 후임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은 1945년 9월22일 OSS의 해체를 명령했다. 도노번은 OSS 해체와 동시에 군에서 퇴역했다. 이후에도 중앙 정보기관의 필요성을 끈질기게 주장하여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1947년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에 서명하면서 결실을 맺었고 그 결과 CIA가 설립되었다. 이후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태국 주재 미국대사로 근무했다. 1959년 2월 8일 도노번은 뇌혈관질환으로 워싱턴 D.C.에서 사망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도노번과 OSS의 유산, CIA
도노번과 OSS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정보기관에 혁신적인 유산을 남겼다. OSS의 경험과 교훈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중형 정보기관인 CIA 탄생의 초석이 되었다. 오늘날의 CIA는 OSS가 수집한 핵심 인력, 파일, 자금, 절차, 그리고 연락책들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또한 정보의 전문화, 조직적 단결심, 정책 결정 및 전투에서 국가 정보기관의 필수적인 역할의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도노번은 국가정보센터라는 자신의 비전을 반영하여 OSS를 설계했는데, 연구 및 분석, 비밀 작전, 방첩, 간첩 활동, 그리고 기술 개발을 독특하게 결합한 이 모든 활동이 오늘날 CIA의 핵심 임무가 되고 있다. 도노번이 제작한 OSS의 휘장(사진)은 오늘날에도 CIA 공작국 휘장으로 남아 있다.
도노번은 명예 훈장, 훈공십자 훈장, 훈공훈장, 국가안보훈장 등 4가지 훈장을 모두 받은 유일한 미국인이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훈장을 받았다. 1988년 10월 26일 CIA 케이시 국장은 이를 기리기 위해 도노번 동상을 제작하여 당시 청사 본부 로비에 설치하였었다. 1992년 6월 12일 CIA는 OSS 창설 50주년을 기념하여 OSS 기념관을 헌정했다. CIA 박물관에도 OSS 갤러리를 부설하여 도노번의 소지품과 많은 OSS 전문 기술장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 세계 스파이 마스터의 최고봉에 도노번의 전설이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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