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삶에 대한 질문이다. 삶이라는 말은 근원적이고 포괄적이다. 삶에의 물음은 존재를 향한 물음이다. 이를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수행함에 문학의 특장과 매력이 있다.
카프가의 ‘성’을 다시 들춰 보라.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왜 살인했나를 다시 생각하라. 이럴 때 삶이라는 명제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필자는 삶이라는 큰 질문을 ‘시대’와 ‘현실’로 축소해온 책임을 느낀다.
이 작품은 두텁지 않은 장편소설이다. 제목은 소설이 기독교에 관련된 사건을 등장시킬 것을 예감케 한다. ‘친애하는 나의 종말’이다. 두 여자 아이와 두 남학생이 등장한다. 이 넷은 종말론을 신봉하는 학교에 다닌다. 여자아이들 이름은 주하나와 구영진, 여기서 구영진은 전학생이다. 이모가 이 학교의 기숙사 사감이다. 주하나의 아버지는 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남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 남편이다. 두 남학생, 하나는 여호수아, 또 하나는 백보훈이다. 두 아이 모두 학교 재단을 지탱하는 유지의 자식들이요 모범생들이다. 이 넷이 학교 신문 동아리를매개로 한 데 어울려 사건을 만든다.
소설에서는 항상 외부에서 들어온 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로렌스 소설 ‘무지개’에서 여성인 어슐라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은 그녀의 윗대에 영국 아닌 핏줄이 섞여 들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이단아 구영진으로 인해 엄격한 종교적 교리 속에서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학교의 아이들에게 균열이 일어난다.
소설의 제목이 시사적인 것은 지금 우리가 바로 종말론적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말하지만, 세상은 세기말 세기초 종말론의 몸살을 앓았다. ‘휴거’라 했고, 1999년이라고도 했다. 이 종말이 불발로 돌아갔을 때, 믿었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던가. 소설에 따르면, 그들은 수학적 계산에 착오가 있었을 뿐, 종말은 예정된 대로 엄연하며 자신들은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세상과 다른 자신들의 원리 속에서 교회를 짓고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신도들과 아이들의 것이었을 뿐,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고, 아이들마저 사실은 종말을 믿지 않았다. 삶은 뜨겁고 계율로 통제할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했으며, 금지를 넘어 사랑할 만한 것이었다. 삶에는 죽음이란 ‘종말’이 있지만 그것은 종말론의 종말은 아니다. 주하나와 구영진은 학교에서의 모든 모험이 끝난 뒤에도 억압된 계율과 폭력적 논리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오랜만에 삶의 근원을 향한 질문이 있는 소설이라 하겠다.
필자는 다시 이 소설을 비유적으로 읽는다. 휴거와 종말론은 일단 불발됐지만 ‘종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종말’은 바야흐로 세계사적 규모로 진행 중이다. 민주주의를 약속한 세력은 정작 스스로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음모와 그것에의 저항, 응징, 베네수엘라, 이란, 그린란드, 그 다음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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