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나의 언어로 쓰는 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퀴어 소설이든 퀴어 담론이든 이 소재나 주제에 관심 가져왔다고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수자 문제를 대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건대, 나의 원칙이랄까를 먼저 이야기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소수자는 말할 수 없다거나 하위주체(서발턴)는 말할 수 없다는 담론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만약 하위주체가 말할 수 없다면 언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는가.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제도적 발화권이 없고, 대표(representation)될 뿐 스스로 말할 수 없으며 식민주의·가부장제·계급 권력 속에서 구조적으로 침묵당한 존재”를 하위주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지 않고는’ 존재를 변화시킬 수 없다.
소수자를 옹호한다고 하면서 그 소수자 집단 내부에서 다시 ‘지배적 주체’의 의식구조와 행동 양태를 보이는 이들을 오랫동안 목도해 왔다. 소수자 담론의, 정의로워 보이는 외양을 빌리면서 그 안에서 오히려 지배적 집단의 행태를 되풀이하는 이들은 본질상 부정의하다.
박민정의 퀴어 소설 ‘아내들의 학교’는 설혜와 선이라는 동성 커플의 삶을 설혜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한다.
배경은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세상이다. 설혜는 동성 커플임에도 아이를 갖고 싶어하고 선은 이를 극력 부정하지만, 결국 여섯 살 난 아이를 입양하여 키운다. 두 사람의 입양ㆍ양육을 둘러싼 갈등이 일종의 봉합을 맞는 것은 모델 지망이었던가, 선이 TV에 나가 콘테스트를 치르면서다. 시청자들 앞에서 아이까지 기르는 동성 커플의 단란한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겨난 것이다.
이 ‘정상적’ 가족의 연출을, 나는 아주 오래전에 재일 작가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에서 접한 바 있다. 가출해서 극단에 들어갔던 유미리 작가에게 해체된 가족의 ‘연출’이라는 모티프는 경험의 자연스러운 소산이었을 것이다.
박민정 작가가 이 유미리 소설을 읽었는지, 그로부터 어떤 발상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좋은 설정이다.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심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제의 하나가 바로 ‘가짜’가 진짜를 연출한다는 설정일 것이다.
무슨 일인가로 나는 이 소설을 꼭 접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에는 이 진짜와 가짜를 판별하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었다. 애꿎게도 ‘아내들의 학교’는 작가가 의도했던 독자적 반응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작품을 누가 의제화했으며 누가 가짜인가 하는 물음에 휩싸여 있다.
퀴어 소설은 작가적 글쓰기, 특히 자전적 글쓰기의 진정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박상영 작가는 확실히 일급이라 생각한다. 자기 문제에 직접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타자의 삶을 침해하지 않고 그러면서 자기 삶의 진정성을 열어 보일 수 있음은 귀한 능력이라 할 것이다.
메시지로 꽉 찬 ‘아내들의 학교’는 작가적 진정성을 묻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사회과학적 담론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오히려 이것이 이 방면 ‘맹장’들의 시선을 끌게 되는 것이리라. 다소 씁쓸하다면 씁쓸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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