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쇠락하는 가운데(美權漸落) 중국은 솟아오르고(中華崛起) 러시아는 영향력을 키우려 몸부림치며(露國奮鬪), 유럽은 살길 찾아 헤매고(歐洲活路) 일본도 부지런히 힘을 키운다(日本奮强).” 이란 전쟁 이후 세계질서에 대한 일단의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대로라면 세계는 ‘킨들버그 함정(Kindleberger’s Trap)’에 빠지고 있는 중이다. 새 도전국이 부상하면 기존 패권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투키디데스 함정‘과 달리, 이는 기존 패권국이 쇠퇴하여 세계질서를 떠받치는 글로벌 공공재를 공급하지 못하는 사이 신흥국이 자국 이익과 영향력 확대에 나서 국제사회는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다는 이론이다.
미국은 신고립주의 국가로 가는 중이다. 안보전략서와 국방전략서를 통해 미국은 “더 이상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가 되지 않겠다”라면서, 미국의 서반구 지배권, 중국 팽창주의를 견제하는 인태지역 힘의 균형, 동맹국들의 자력 안보, 미국의 이익과 무관한 지역 개입 최소화 등의 전략을 표방했다. 동맹국에 대해서도 ‘안면몰수’ 무역전쟁에 돌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압적 화법과 잦은 말 바꾸기로 동맹 관계는 소원해지고, 나토동맹은 기로로 내몰렸다.
지금 미국은 반전 여론에 쫓기며 이란과 대치하고 있다. 우세한 군사력으로 상당한 ‘전술적 성과’를 거뒀지만, 신정체제 붕괴, 정권 교체, 이란 핵 개발 차단 등 ‘전략적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한 채 출구를 찾고 있다. 반면, 중국은 이란에 경제·외교·군사적 지원을 하면서 미국의 분열을 지켜보고, 서방세계에는 대만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호통친다. 중국이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와 글로벌 사우스가 영향력을 키우고 있고, 유럽의 베이징 방문도 빈번해진다. 미국의 상업적 신고립주의는 당장은 이익이겠지만, 멀리 보면 경제력의 상대적 쇠락과 도덕적 리더십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질서는 강대국들의 ‘제한적 다극화’로 가고, 약소국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지금 한반도에도 축소판 킨들버그 함정이 작동 중이다. 미국이 ‘엉클 샘’ 역할을 포기함에 따라 대한(對韓) 방위공약과 핵우산은 유명무실해지는데, 설상가상 북한은 한국을 ‘정복해야 할 적대국’으로 규정한다. 북·중·러 ‘북방삼각’의 핵 협력도 공고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분열된 한국이 부족해진 안보 공공재를 자체 조달할 수도 없다. 워싱턴에서 주한미군 감축론이 나오지만,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겐 마이동풍이다. 정부 바람대로 현 전작권 체제가 분리되고 연합사가 형해화되면 동맹이 제공해 온 핵심적 전쟁 억제 장치가 사라진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지금 한국은 6·25 이래 전쟁 개연성이 가장 높은 시기를 살고 있다.
국내 일각에서도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쇠퇴하는 미국’을 멀리하자는 비아냥이 나오지만, 이는 위협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여건을 망각한 위험한 이상론이자, 당장 살아남지 못하면 장기 대책을 수립할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현실을 외면하는 천견(淺見)이다. 미국의 고립주의가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어떤 경우든 최강의 군사력은 상당 기간 불변일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동맹이 한국 안보에 보탬이 되도록 묶어둬야 한미 간 혈맹의 역사는 거래적 관계를 초월한 결속제가 될 것이다. 오늘 국가가 생존하지 못하면 내일의 번영도 없다. 정치싸움에 본분을 망치고 패망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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