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어떤 인생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실제 삶이 그 부분적 모방에 불과할 영화보다 더 활력적이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사례들이 더러 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이 결국 순간순간의 몇몇 장면들과 그것들에 대한 사진들로만 남는 법이라는 시쳇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 말은 인생과 영화가 사진 이미지를 접점 삼아 극적으로 만난다는 통찰에 닿아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리 밀러의 삶도 사진을 중심 삼는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니다. 그녀 인생의 주요 국면에 사진이 늘 자리함을 기억하면, 그녀의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활동사진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미국 패션 잡지 보그의 톱 모델로 사진에 담겼었던 그녀는 파리로 가 만 레이와 함께 솔라리제이션 기법을 고안함으로써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로 변신했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여성 종군 사진 기자로서 프랑스 해방과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역사적 현장을 사진들로 찍어 잊지 못할 족적을 저널리즘 역사에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종전 후, 영국에 정착하여 사망하기까지 PTSD와 우울증을 겪었던 그녀의 뇌리에는 아마도 여러 트라우마가 잊지 못할 장면들로 남아 있었나 보다.
앨런 큐라스 감독이 연출하고 케이트 윈슬렛 배우가 주연을 담당한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이하 ‘리 밀러’)’는 리 밀러의 일생을 마치 사진 찍듯이 상당히 충실하게 재현하는 양상을 띤다. 이렇게 충실한 재현을 택한 ‘리 밀러’는 사뭇 풍요롭게 해석될 수 있는 지점들과 더 우수하게 연출될 수 있었을 여지를 함께 보여주어서 비평적 논의를 촉발한다. 절반의 성취와 절반의 한계를 동시에 남긴 셈이다.
이 영화의 굵직한 장점은 리 밀러의 고난과 정의감을 꽤 정직하게 극화하려 한 진지한 태도에 놓일 것이다. 케이트 윈슬렛의 적정한 연기도 영화의 그 태도가 유의미한 성과로 산출되는 데에 이바지했다. 리 밀러가 당시의 여성 종군 기자로서 겪었을 만한 성차별적 대우로 인한 복잡한 감정과 언론인으로서 느꼈을 만한 사명감을 담담하고도 묵직하게 형상화되는 데에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일정 수준의 안정적 기여도를 점한다.
그러함에도 이 글의 시선에는 의외로 ‘리 밀러’가 지닌 풍부한 해석적 잠재력이 더 인상적으로 포착된다. 영화의 시각적 무의식을 드러내었던 벤야민의 형안을 빌리면, 영화에 내재한 여러 요소에 관한 명해(明解)를 풍성히 도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 명해는 시각 이미지를 중심 삼아 설득력 있게 이루어질 수 있다.
리 밀러가 종군 기자로 진출하기 전에 프랑스에서 보냈던 삶을 담은 부분에서는 유방 노출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녀가 롤런드와 입을 맞추고 성행위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여성의 성적 육체성을 강조하는 이런 연출은 자칫 여성 배우의 성적 대상화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 종군 기자 리 밀러의 삶을 다루는 영화이기에 이런 연출이 꼭 필요했다고 판단된다. 그녀가 지녔던 여성으로서의 면모와 그로 인한 애증이 삶의 엄연한 일면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의 나체가 된 그녀의 유방과 상반신에 물감이 칠해지는 장면도 그녀가 지닌 여성성과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경력을 압축한 장면으로 해석된다.
영화에 나타나는 히틀러의 얼굴과 모습은 당대의 불길한 전운을 내비친다. 영화에서 히틀러가 흑백영화와 초상화로 나타난 것은 흥미롭다. 영화는 감독의 연출과 편집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왜곡될 수 있는 주제를 전하는 내러티브다. 회화는 화가의 관점과 기법에 따라 주관적으로 구성되는 이미지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회화는 주관적 변용이 상대적으로 쉽게 일어나는 예술 장르다. 사진도 피사체의 자세, 촬영의 구도, 환경의 설정 등으로 특정 의미를 만들 수 있으나, 카메라를 통해 현실의 단면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복제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앞의 둘과는 미묘히 변별된다. 그녀가 종군 기자였던 1940년대에는 디지털카메라를 통한 정교한 사진 조작 기술이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진의 객관적 복제가 거의 거짓 없이 이루어졌을 법하다. 이 맥락들을 종합하면, 전쟁과 유대인 대학살을 범한 나치의 사악함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사진을 통해 은연중에 표출되는 효과가 생긴다. 리 밀러의 발이 갈고리 십자가를 중앙에 품은 독수리 문양, 즉 나치의 상징을 밟는 쇼트도 ‘리 밀러’의 정의로운 의도가 담긴 무의식으로 포착될 수 있다.
이렇게 리 밀러의 용기 있는 생애가 꽤 선명히 구현된 것은 성취로 인정되나, 그 정직함이 경직된 연출로 이어진 한계도 적지 않다. 그녀의 인생에서 종군 기자 시기가 큰 비중을 점하는 것은 맞으나, 그 외의 시기들은 약간 소략하게 다루어진 아쉬움이 있다. 그녀가 초현실주의 사진작가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영화 자신이 택한 회고적 구성 방식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다소 느슨히 선형적으로 나열되는 느낌을 지울 수 있었을 터이다. 특히, 이 영화가 카메라와 사진을 중요하게 다룸에도 사진을 예술적 긴장의 매개로 쓰는 데에는 미숙했다는 점도 아쉽다. 가령, 리 밀러가 히틀러의 욕조에 들어가 사진 찍는 장면에 그 실제 사진을 교묘히 삽입하는 연출을 시도했다면, 영화와 현실 간의 오묘한 긴장 관계가 생성될 여지도 있었다.
이렇게 발전 가능 지점들을 제시하는 것이 영화의 한계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실제 인물들의 생애를 극화할 미래의 영화들이 한 편의 영화로서 자족적 예술성을 확보하는 데에 참고될 만한 의견을 남기려는 의도가 훨씬 절박하다. ‘리 밀러’를 포함해 뭇 영화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명해(溟海)가 이토록 막막하다.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자(2023)’ 줄거리
리 밀러가 노인이 된 1977년의 시점에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과거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펼쳐진다. 보그의 톱 모델로 활약하던 패션 뮤즈였던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도미해 당대의 최초 미군 공인 여성 종군 기자가 돼 전쟁의 격렬한 현장과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을 사진으로 찍어 남긴다.
앨런 큐라스 감독 소개
앨런 큐라스는 미셸 공드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의 제작 과정에서 촬영감독으로 참여했었는데, 케이트 윈슬렛은 그 영화의 여주인공 클레멘타인을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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