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는 잔혹한 도끼질과 섬세한 바느질이 모두 아로새겨져 있다. 범죄 액션의 피 튀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상이한 시공간과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을 유려하게 잇는 그의 연출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2013)’는 과격한 폭력성과 유연한 응집성을 절묘히 구현한 영화로 기억된다. 그 영화에서 더 나쁜 짓을 안 하기 위해 때로는 나쁜 짓을 할 필요가 있다는 대사가 발화되는 것도 기억하면, 양면적 아이러니가 그의 영화를 이루는 한 요체임이 보다 잘 다가온다.
다른 한 요체는 그가 원작을 각색한 영화를 꽤 많이 연출한 점이다. 이병헌을 포함한 뭇 배우들이 남한군과 북한군의 비극적 우정을 진중히 연기한 ‘공동경비구역 JSA(2000)’는 박상연의 장편 소설 ‘DMZ(1997)’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다. 뉴 코리안 시네마를 정초하는 데에 공헌한 영화 ‘올드보이(2003)’도 츠치야 가론의 동명 만화가 그 원작임을 떠올릴 수 있다. 뱀파이어 영화로 유명한 ‘박쥐(2009)’의 핏줄이 에밀 졸라의 장편 소설 ‘테레즈 라캥(1868)’에 닿아 있음도 또 유명하다.
특기될 만한 점은 박찬욱의 영화가 원작 서사를 일정히 수정해 하나의 독립된 영화로 탈바꿈시키는 데에도 유능하다는 점이다. 그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장편 소설 ‘액스(최필원 譯, 지식하우스, 2025(개정판). 이 글에서 괄호 안에 쪽수만 적힌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됨)’에 기초한 각본 작업에 참여해 연출한 ‘어쩔수가없다(2025)’도 그 능란한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영화로 평가된다. ‘어쩔수가없다’는 잔혹한 범죄를 활력 넘치는 한국적 정서로 유연히 연출한 영화로 위치 지어질 때, 그 개성과 성취가 정확히 파악될 수 있다.
이 영화의 평가에서 가장 논쟁적일 지점은 재취업을 위한 주인공 유만수의 살인이리라. “구조조정의 칼바람(70쪽)”을 맞아 돌연 해고된 그가 허위 기업을 차려 자신보다 우수한 동종업계 경쟁자들을 죽인다는 설정은 원작과 똑같다. 이 “계획의 아이러니(65쪽)”에 제기될 법한 비판은 살인 같은 죄악을 범하기보다는 자기 직무 역량을 강화하거나 타 업종으로 아예 전직하는 선택이 온당하다는 비판일 것이다. 이 비판은 소설과 영화의 설정이 불법행위를 합리화하는 비윤리성을 보인다는 비판과도 이어진다.
그러나 내러티브 예술의 감상과 평가가 법적 심판과는 별개로 취급돼야 마땅할 때도 있다. 예술 텍스트의 분석에서 때로는 윤리적 판단의 목적론적 중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작품의 캐릭터가 어떤 심리와 의도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른 행위가 얼마나 극단으로 폭주하는지 탐구하는 것은 윤리적 판별과는 또 다른 의미와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이 맥락에서 만수의 살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의 극단적인 심리와 선택이 치달을 수 있는 한 사례를 탐구하는 인간학적 영역에 놓일 수 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만 하는 극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54쪽) ” 망설이면서도 끝내 “나는 식구들 입에 밥을 넣어 주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박찬욱 외, ‘어쩔수가없다 각본’, 을유문화사, 2025, 21쪽)”라고 결심하는 선택이 최소한 만수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타인에게 말할 때, 발화 내용을 손바닥에 적어둔 붉은 글씨들을 몰래 보면서 말하는 장면이 많다. 이 장면은 영화의 의미와 재미에 양면적 입체감을 더한다. 겉으로는 번듯하나 안으로는 허황한 그의 이중성이 드러나면서도 이 이중성이 이병헌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통해 더 큰 재미를 얻는다. 배우가 상대를 보면서 말하는 때는 그의 얼굴을 비추다가 손바닥에 적힌 글씨들을 힐끗 보는 때는 그 손바닥을 비추는 카메라의 이동도 그 이중성을 부드럽게 구현한다.
만수는 살인 행각을 교묘히 숨긴다는 점에서도 양면적이다. 그런 그가 권총을 들고 제지업 경쟁자의 집에서 살인을 감행하는 씬에서 조용필의 가요 ‘고추잠자리’가 배경 음악으로 깔린 것은 상당히 의도적으로 여겨진다. 이 노래는 진성으로 불리는 흥겨운 멜로디와 가성으로 불리는 처연한 멜로디로 양분된다. 이 반전 구조는 영화의 양면성에 잘 어울린다. 소설 ‘액스’를 각색한 영화로는 코스타 가브리스 감독의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2005)’가 이미 있는데, 그는 원작의 내용과 정서를 웃음기 없이 꽤 충실히 살리는 쪽으로 연출한 감이 짙어서 그만큼 건조한 평면성도 있었다. 반면 ‘어쩔수가없다’는 통통 튀는 블랙코미디 유머로 시종일관 가득하다. 경쟁자가 자신에게 총을 겨눈 만수와 농담 비슷한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는 ‘고추잠자리’의 서글픈 가성 파트가, 반대로 어깨에 총을 맞은 경쟁자가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는 때는 활달한 진성 파트가 흐른다. 엇박자에 가까운 이 상충적 연출은 한국적 정서를 영화에 자연스레 첨부한다.
한국적 정서의 영화적 자장도 참고하면, 충치로 치통을 겪는 만수는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1961)’에서 치통을 앓는 철호를 연상시킨다. 다만, 둘의 선택과 상황은 다르다. 만수는 감염된 이를 몽키스패너로 직접 스스로 뽑는데, 이 과감함은 만수가 자발적으로 택한 범행과 연관된다. 철호는 가난 때문에 치과 진료를 미루다가 결국 발치하고 그 통증으로 의식이 흐린 속에서 동생의 강도 범행을 떠올리는데, 이 처량함은 철호가 놓인 전후의 혼란한 사회상과 연관된다. 후자가 어쩔 수 없이 병자로 전락한 오발탄이라면, 전자는 어쩔 수 없이 살인자로 타락한 직격탄이다.
‘어쩔수가없다’는 그 직격탄을 유연히 연출해 양날의 강력한 도끼질로 발휘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평가된다. 그 분명한 개성과 성과가 박찬욱의 빼어난 감각에 근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2025)’ 줄거리
제지회사 사원이자 행복한 가장으로 살고 있던 유만수(이병헌 배우). 그는 회사에서 돌연 정리해고가 된다. 3달 안에 재취업하리라 결심한 그였으나, 3달이 넘어도 재취업은 되지 않는다. 그는 유령 제지회사를 차려 지원자들 중 자신보다 우등한 이들을 선별해 몰래 살해한다. 우등 스펙 보유자들을 다 제거한 그는 타 제지회사에 재취업하게 된다.
박찬욱 감독 소개
박찬욱은 2004년에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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