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 앉아 ‘춘원연구학보’의 논문들을 읽는데, 젊은 학자들의 연구가 무척 치열하다. 젊을 때 분석이 치밀하고 문체가 날카로운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들을 더욱 치열한 글쓰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생존과 ‘이름’이 달렸기 때문이리라.
이광수의 초기 문장, 작품들 속에서 ‘번역’의 의미를 찾아본 것도 흥미로웠고, 남들 같으면 공부를 접을 나이에 공부에 뛰어든 분이 쓴 이광수 문학과 톨스토이 관련성도 관심이 간다. 박순녀 문학 연구는 그녀 소설 ‘어떤 파리’였던가에, 4·19 직후 그녀와 김이석 부부 집으로 김수영 시인이 숨어든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에서의 박경리 문학 연구 동향을 살피고 향후 과제를 논의한 것도 글쓴이가 박경리를 다 읽다시피 한 사람이어서 관심이 간다.
공지영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정의윤리’와 ‘돌봄윤리’의 충돌을 논의한 논문은 더욱 눈길을 끌었다. 젊은 비평가들이 언젠가부터 돌봄, 돌봄 해 온 것을 다소 냉연히 바라본 필자였기에, 또 비슷한 이야기려나 했는데, 그렇지가 않다. 논문 요점은 1980년대란 정의윤리(ethics of justice)에 의해 돌봄윤리(ethics of care)가 억압된 시대였으며, 공지영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 점에서 문제적 소설임에 틀림없다.
넬 노딩스라는 학자가 이 돌봄이라는 문제를 깊이 고민했다고 한다. 논문은 노딩스에 이르는 ‘돌봄 철학’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면서 치밀한 논의를 이어간다. ‘돌봄(caring)’을 ‘의미적 뉘앙스’를 고려해 ‘배려’ 대신에 ‘돌봄’으로 옮기겠다 한 것이나, ‘마음이 타자에게 붙들려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engrossment’를, 이 말의 “수용적·비판단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전념’ 대신에 ‘잠김’으로 옮기고자 한다”는 문장 등등도 아주 좋았다. 어설프게 영어권에서 공부한 전력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속물성과는 다른 진지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사실, 국문학계에서 외국어 실력 자랑하는 것처럼 위험스럽고 우스꽝스럽기 십상인 것도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 훌륭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이들이 많다.)
결국, 레닌의 ‘당 건설론’ 팸플릿 제목을 딴 공지영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작은 확실히 문제작이었다. 공장 활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집단합숙을 이어가는 조직에 파문이 일었고, 이는 조직의 지도자격 남자가 감기에 걸리자, 그의 내력을 아는 주인공이 그를 위해 ‘파 뿌리’를 삶아준 데서 시작되었다. 민주화든 민중혁명이든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윤리의식이 작동하는 공간에서 여자는 그 자신의 지극히 ‘사적인’ ‘돌봄’을 행했던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그 시대에는 ‘죄’였으며, 자기비판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기 옆의 곤경에 빠진 자를 외면하는 일들은 오히려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 짓고 있는 정의로운 자의 표정을 보노라면 ‘잠김’이란 얼마나 도달키 어려운 마음의 상태인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도무지 ‘잠기기’ 어려운 족속들이다.
한 사람을 위해 ‘잠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윤리를 논할 수 있다. 정의를 외치기만 하는 이는 아직 ‘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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