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환과는 달리 최준민은 라라를 깍듯이 누님 혹은 형수님으로 대하고 있었다. 준민은 라라의 대학 동창 진수연에게 관심이 있었다. 수연이 중국에서 귀화한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짱꼴라네 했지만, 눈에 띄는 미모의 수연에게 준민은 계속 호감을 감추지 않았다.
라라와 수연이 지환과 준민을 처음 본 것은 예비학부 입학할 때 학교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였다. 잔디밭에서 스쳐 간 두 남자가 라라와 수연에게 다가왔다.
“인사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들은 철들지 않은 사내들 티가 너무 났기 때문에, 라라나 수연은 관심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학생 전체 회식 자리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거였다.
그후 준호는 툭하면 사람들을 붙들고서 떠들기 일쑤였다.
“라라가 맨날 그런 놈들하고 희희덕거리며, 칠렐레 팔렐레 돌아다닙니다.”
그러면 라라와 준호를 모두 잘 아는 지인들은 준호가 겉보기와는 달리 무능한 데다 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다. 그러나 먼발치에서 가끔 넘겨다보는 사람들 눈에 그는 영락없는 성인군자였다.
특히 백성만은 늘 외로운 자신을 불러 밥을 먹여주는 준호가 고마울 뿐이었다.
“준호 형님은 부처님 반토막입니다. 성인군자예요.”
준호가 웃을 때 특히 호인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는 하늘이 마지막으로 허락해 준, 혹은 악마가 준 밑천으로 여겨졌다. 얼핏 보면, 준호는 너른 들판 같고 바다 같은 심성을 지닌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상 그 물은 발목도 채 잠기지 않는 깊이였다. 안타깝게 찰랑거리는 접시 속 물이었다. 그걸 파악하는 데 3개월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스쳐 지나면서 대하는 사람들은 보통 인상만으로 판단한다.
그런 점에서 라라는 늘 큰 손해를 보는 편이었다. 그녀는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처럼 보였고, 준호는 가해자이지만 피해자처럼 보였다. 신의 은총일까, 악마의 저주일까. 준호의 존재와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그에게는 전자였고, 라라에게는 후자였다.
처음에는 준호도 그걸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의 입지가 초라해지기 시작하자 변명을 찾기 시작했다.
“라라는 남자 없으면 못 사는 여자예요. 늘 남자들에 둘러싸이길 원하죠.”
라라를 만났을 때, 준호는 대학 졸업을 포기하고 있던 나이 든 대학생이었다. 왜 그렇게 나이가 들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라라는 그에게 인생의 목표를 찾아주고 싶었다.
“돌파구를 찾아야지. 이대로 허송세월할 수는 없잖아. 유학 가자, 미국으로.”
라라의 설득은 효과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핑계를 찾았다.
“미제의 앞잡이가 되고 싶지 않아.”
제국주의니 자본주의의 침탈이니 하는 것이 준호가 미국을 기피하는 변명이고 구실이었다. 그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열등감이었다. 유학 자체가 공포였다. 여기에는 웃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졸업 후 친한 선배가 만든 서클에서 알게 되어 사귄 지 3개월이 되자, 라라는 준호가 자신과 인생에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 않음을 눈치챘다. 그와 한국어로 소통하는 게 외국인과 외국어로 소통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가치와 세계관의 공통분모가 없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일 뿐이었다.
라라는 준호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그러자 눈 오는 겨울날, 준호는 라라의 집 앞으로 장미꽃을 들고 찾아와 울먹였다.
“너와 헤어질 수 없어.”
“적어도 한국에서 살려면 대학 졸업장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대학 졸업장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남들 다하는 대학 공부 정도는 했으면 한다는 거야. 최우수 졸업을 원하는 것도 아니야. 졸업만은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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