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말로 주고 작은 말로 거뒀다. 제나라 전(田)씨 가문은 백성에게 빌려준 곡식을 절반만 돌려받았다. 염전과 철광산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전걸(田乞)은 손해를 감수하는 금융기법(大斗出小斗進)으로 민심을 얻었다. 굶주렸던 백성은 “나물을 캐서 전씨에게 바치자”고 노래까지 불렀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명재상 안영은 기원전 539년 “제나라가 아마 전걸의 나라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민심을 얻은 전씨 가문이 천하를 얻었을까?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강태공 후손인 제 환공은 기원전 672년 망명객 진완(陳完)을 따뜻하게 맞았다. 성을 전(田)으로 바꾼 진완은 기술과 장인을 총괄하는 공정(工正)이 됐다. 오늘날로 따지면 산업부와 국토교통부, 과학기술부, 방위사업청 수장을 겸임한 셈이다. 전씨 가문은 공정을 세습하면서 소금과 제철 사업권을 장악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전걸은 적자 대출로 민심을 얻더니 기원전 489년 군사반란으로 조정까지 장악했다.
안영 예상대로였다. 전걸은 민심과 함께 권력까지 차지했다. 아들 전상(田常)은 임금을 죽일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전상 증손자 전화(田和)는 기원전 391년 스스로 왕이 됐다. 제나라 32대 군주 강대는 바닷가로 쫓겨났다. 전걸부터 전화까지 전씨 가문은 5대에 걸쳐 104년 동안 재상으로 군림하더니 역성혁명에 성공했다. 전씨가 나라를 빼앗은 사건 전씨대제(田氏代齊)는 경영인과 회사 주인의 갈등을 다룬 대리인 이론(Agent theory)과 닮았다.
곳간에서 인심이 났다. 최윤범도 고려아연을 경영하면서 연봉부터 올렸다. 최윤범이 회장이 되자 고려아연 1인당 평균연봉은 2023년부터 1억원을 넘어섰다. 손해를 감수하며 백성에게서 환심을 샀던 전걸을 빼닮았다. 경영권 분쟁이 터지자 노조는 진짜 주인(최대주주)인 장씨가 아닌 대리인 최씨 편에 섰다. 두툼해진 월급봉투가 최윤범에게 든든한 방패로 작동한 셈이다. 회삿돈으로 참호를 판 대리인의 치밀한 포퓰리즘이다. 고려아연 평균 연봉(1억 2,140만원)은 지난해 LG전자(1억 1,734만원)를 넘어섰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행보도 판박이다. 장병희와 최기호는 1949년 ㈜영풍을 공동창업했다. 최기호 후손이 지분을 팔았기에 영풍그룹과 고려아연의 주인은 장병희 후손의 몫이었다. 장씨 가문은 동업정신을 바탕으로 최씨 가문에게 고려아연 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최윤범 회장은 경영권을 무기로 삼아서 발톱을 드러냈다. 자사주 교환과 제3자배정 유상증자로 우호 지분을 모았고 회사 주인을 바꾸려고 경영권 분쟁까지 일으켰다.
과거 제나라 군주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지만 장씨 집안은 회사를 뺏기진 않았다. 고려아연 최대주주 ㈜영풍은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대리인의 폭주에 저항했다. 최윤범 회장의 고려아연 뺏기는 아직까진 절반의 성공에 머무르고 있다. ㈜영풍으로부터 고려아연을 뺏으려는 욕망은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대리인 리스크일 따름이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꼬리가 머리를 집어삼키는 도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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