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사람들과 결속이 잘 되었다. 공감대가 분명한 탓이다. “아유, 너무 덥지요? 더위에 어찌 지내세요?” 이 말 한마디면 모두 의견일치를 본다. “힘들어서 죽겠어요. 이렇게 덥다니, 하늘이 미쳤나 봐요.” 우리 모두는 피해자고 고생이 말이 아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만장일치로 ‘하늘’이다. 그랬다. 요즘 최고기온 29도를 선선하다고 느끼니 지난 여름은 정말로 더웠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이 아직껏 접수하지 못한 영역이 날씨, 즉 자연이다. 그래서 기분도 날씨 탓, 주가도 날씨 탓, 건강도 날씨 탓, 정치도 날씨 탓이다. 고대 동양 사람들도 자연과 천체의 변화에 매우 예민했다. 농사를 지어 먹어야 사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허탕이다. 가뭄이나 폭우, 오뉴월 찬 서리 이런 것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직방으로 군주를 욕했다.
언뜻 보면 이해가 안 되지만 동양의 논리에서는 그럴싸한 일이다. 군주가 누구인가? 그는 하늘의 아들이다. 천자(天子)이다. 친생자는 아니지만 하늘이 뽑아서 아들 삼은 인물이다.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을 때 그 책임은 하늘의 대리자인 왕에게 돌아간다. 왕이란 백성을 먹고살게 하는 존재인데 날씨가 제대로 안 돌아가면 그 1차 책임을 져야 한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이다.
여기에는 하늘과 땅이 교감한다는 동양의 믿음이 자리한다. 땅에 사는 사람들이 부조리와 불합리로 괴로워하면 그 원성은 하늘로 올라간다. 땅의 기운이 하늘에 영향을 주게 된다. 하늘의 순행은 막히고 천재지변과 기상이변이 일어난다. 이렇게 땅(인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하늘(자연)에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옛사람들은 믿었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은 땅에서 비롯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각을 좁혀보면 대다수 자녀가 부모 탓을 하는 것도 연관된다. 자녀는 애초에 부모를 선택할 수 없으므로 기회의 상실과 심적인 문제 등 많은 것을 부모에게 돌린다. 그들에겐 부모가 하늘이니 어쩔 수가 없다. 부모가 연로해지고 판단능력과 체력이 저하되어 자녀가 돌봐야 할 지경이 돼도 원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만큼 부모는 자녀에게 절대적 존재다.
잉마르 베르그만 (Ingmar Bergman) 감독의 명작 ‘가을 소나타’에는 저명한 피아니스트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년의 큰딸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지만, 예술가 엄마는 딸의 마음을 알아차릴 능력이 없다. 7년 만의 해후에서 그들은 치열하게 공방을 벌인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딸에게는 산더미 같은 이야기가 있다. 엄마도 자신의 유아기를 말한다. 결핍은 통상 유전된다. 불통은 고질병이다. 그들은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딸은 말한다. “인생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인생의 겨울을 기다리는 필자의 시선은 엄마에서 딸로, 딸에서 엄마로 무한반복해야 했다. 그들의 대화와 표정에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자녀에게 부모는 하늘 같은 존재이리라. 백성에게 임금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인간에게 자연이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