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떨어지자 반도체주가 웃었다. 얼핏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최근 금융시장에서는 유가와 금리, 반도체주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움직이고 있다. 기름값이 물가를 흔들고, 물가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결정과 국채금리에 영향을 주며 다시 반도체를 비롯한 성장주의 투자심리를 좌우하는 구조다.
SK증권 자산전략부 윤원태 부서장이 22일 유가 하락에 따른 금리 부담 완화를 최근 증시 반등의 주요 배경으로 꼽았다. 윤원태 부서장은 본지에 “9월 초 이후 증시를 눌렀던 가장 큰 요인은 고유가와 고금리였다”면서 “전날 유가가 100달러 아래로 내려가면서 금리 부담도 줄어드는 모습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4.52달러(4.51%) 떨어진 95.7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WTI 종가가 배럴당 100달러 아래로 내려온 것은 이달 9일 이후 처음이다. 국제유가 급등세가 한풀 꺾이자 주식시장과 채권시장도 즉각 반응했다. 고유가가 자극했던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 우려가 일부 완화될 수 있다는 기대가 시장에 반영됐다.
증시 움직인 유가 ‘나비효과’
유가가 증시를 움직이는 첫 번째 변수는 물가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휘발유와 경유 등 에너지 가격뿐 아니라 운송비와 생산비 부담도 커질 수 있다. 반대로 유가가 안정되면 시장에서는 물가 상승 압력이 완화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된다.
다음 연결고리는 금리다. 물가 부담이 낮아질수록 미국 연준이 추가로 금리를 올려야 하는 부담이 줄어든다. 특히 최근 금융시장이 주목하는 것은 미국 장기 국채금리다. iM증권은 유가 안정이 가시화하면 장기 국채금리의 추가 상승 위험도 크게 줄어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윤 부서장도 최근 금리 변동성이 다소 낮아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주 FOMC 이후 금리 전망에 대한 불확실성이 일부 안정되면서 금리 변동성도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다만 앞으로는 유가의 방향에 따라 금리도 함께 등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금리 변화는 반도체를 비롯한 성장주에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성장주는 현재 실적뿐 아니라 앞으로 벌어들일 이익에 대한 기대가 주가에 크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시장금리가 오르면 미래 이익의 현재가치가 낮아져 주가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금리가 안정되면 밸류에이션 부담도 완화될 수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한 기대가 다시 강해지는 상황에서 유가까지 하락하면서 반도체주를 둘러싼 투자 환경이 동시에 개선되는 모습이다. iM증권은 AI 낙관론이 강화되는 가운데 유가가 안정된다면 주식시장의 상승 동력이 한층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식으로 단순화하면 ‘유가 하락→인플레이션 부담 완화→금리 상승 우려 완화→성장주 부담 감소’로 이어진다. 최근 반도체주가 국제유가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경이다.
100달러 아래로 내려왔지만…유가 향방은 안갯속
다만 유가 하락세가 그대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이번 유가 급락에는 미국과 이란 간 대화 기대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공급 확대 가능성이 동시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가 걸프만에서 초대형 유조선 7척에 원유 1400만 배럴을 선적했고, 최근 엿새 동안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사우디 원유도 하루 평균 290만 배럴에 달한 것으로 추산됐다. 공급 차질 우려가 완화되면서 국제유가를 끌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SK증권 윤원태 부서장은 원유 공급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윤 부서장은 “유가 전망이 어려운 것이 핵심이다. 미국과 이란 정상 간 만남이 실제 성사될지, 성사된 뒤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따라 유가의 방향성이 결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그는 “그전까지는 유가가 현재 수준에서 큰 변동성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며 “그동안 금리에는 유가와 국채 수급 악화가 함께 영향을 줬는데 국채 수급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 유가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금리도 동반 등락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중동 정세가 다시 불안해질 경우다. 원유 공급 차질 우려가 재부각되면 유가가 다시 상승하고, 물가와 금리에 대한 시장의 경계심도 되살아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반도체주의 상승 흐름도 AI 기대만으로 설명하기보다 국제유가와 미국 국채금리까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국 지금 금융시장에서 기름값은 주유소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다. iM증권은 유가 움직임에 따라 자산가격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른바 ‘유가 장세’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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