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소통문화아카데미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스카이데일리
다름을 만나는 우리의 자세를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외국인이지만 혹은 같은 다름이지만, 어떤 ‘크기’의 나라에서 왔는지 혹은 어떤 지위로 어떤 일을 하는지 등에 따라, 그 다름은 다르게 만나진다.
예를 들어, ‘작은 크기’의 나라에서 온 외교관들은, 다름임에도 같음 혹은 그 이상의 대접을 쉽게 받는다. 따라서 다름이 늘 혐오와 배제의 대상은 아니다. 다름의 종류 혹은 크기에 따라 만남의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름에 ‘못함’, ‘덜함’이 더해져서 대접, 만남, 소통의 크기가 작아진다.
때문에, 다르다고 무조건 배제하진 않는다고 했다. 다름에 나라나 직업, 소유물 등의 크기에서 ‘더함’이 붙을 땐, 대접의 크기가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오히려 선망하고 만나려는 크기로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두 종류의 다름이 이야기 될 수 있다.
하나는 우리들이 싫어하고 밀어내는 ‘작은 다름’이고, 다른 하나는 선망하고 끌어들이려는 ‘큰 다름’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못한 다름’, ‘아닌 다름’, ‘약한 다름’이 ‘부정되어야 할 다름’으로서의 ‘작은 다름’의 범주에 속한다.
올려 보든 내려 보든, 밀어내든 끌어들이든, 다름들을 만나고 대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다. 두 방식 모두가 ‘일종의 사대주의’로서 ‘큰 크기’만 인정하고 평가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큰 크기든 남이 큰 크기든, 큰 크기만 인정하거나 올려보고 끌어들이려 할 때, 무시와 배제, 폭력 속에서 수많은 작은 크기들의 삶은 크게 작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우리에게 외국출신의 사람 만남으로만 한정될까? 아니다.
같은 문화와 지리, 국적 속에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는 우리들 안에서도, 수많은 다름들이 있고 이들이 다시 ‘큰 다름’과 ‘작은 다름’으로 나뉘면서, 배제와 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작은 다름’들도 하나의 같음으로 인정하고, 이 ‘작은 다름’에 대한 폭력과 배제를 배제하려는 자세와 실천들의 총합이, ‘열린 예문화’, ‘열린 만남문화’ 혹은 ‘열린 소통문화’라 할 것이다.
이웃나라들과 만나는 일에 도(道)가 있느냐는 제선왕의 질문에, 맹자는 어진 자들만이 큰 크기로서 작은 크기를 섬길 수 있다는 ‘이대사소’(以大事小)와, 지혜로운 자들만이 작은 크기로서 큰 크기를 섬길 수 있다는 ‘이소사대’(以小事大)를 말한다.
만남에서 크기와 상관없이 서로를 섬기고 존중하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생각을 함께 열고 나누고 키우면서, ‘작은 다름’들도 같음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실현할 수 있는 제 조건들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제도적, 문화적 조건들을 갖추려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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