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의 사소한 습관’ ‘꿈이 현실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 등의 제목을 가진 영상과 글을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독서’다. 서점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작곡가 슈만은 많은 책을 읽으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청년이 되어서는 괴테·바이런·셰익스피어·장 파울의 작품을 술술 외울 정도였다. 7세부터 시와 소설을 썼고 작곡도 했다. 즉흥 연주도 잘 했다. 그럼에도 슈만이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한 나이는 18세다.
뒤늦게 시작한 음악공부로 조바심이 생겼던 걸까. 슈만은 무리한 피아노 연습 때문에 손가락을 다치면서 더 이상 연주자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작곡가와 비평가로서의 길을 택한 슈만은 24세에 음악전문지 ‘음악신보’를 창간했다. 음악신보를 통해 슈만은 음악계 소식을 전하고 음악가도 소개하고 작품에 대한 평론도 썼다.
슈만은 글을 쓸 때 가상의 캐릭터를 사용했다.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슈만의 외향성과 내향성을 각각 대변하는 인물로, 실생활에서도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이름을 번갈아 사용할 정도로 두 캐릭터에 대해 진심이었다. 서로 다른 두 자아에 집착하는 성향 때문에 슈만의 정신병은 오래 전부터 이미 예고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슈만은 가상의 예술가 모임인 ‘다비드 동맹’을 만들고, ‘다비드 동맹 무곡’이라는 피아노 모음곡도 작곡했다. 베토벤·베를리오즈·클라라처럼 음악의 본질을 추구하는 실존 인물의 동맹을 생각했지만 ‘다비드 동맹’은 슈만 내면에 존재하는 가상의 커뮤니티일 뿐이었다. 슈만은 ‘다비드 동맹’을 통해 음악적 기교만을 과시하려는 음악인들을 견제하려 했다.
얼마나 참신한 생각인가. 문학적이다. 엉뚱하지만 재미있다. 슈만이 가상의 인물과 단체를 만들어 그의 생각을 전달했듯이 현대인들도 SNS·블로그 등의 플랫폼을 통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본명을 쓰기도 하지만 가명(필명)을 쓰기도 한다. 정치·경제·문화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가감 없이 세상에 드러내고, 때로는 현실을 바꿀 만큼 강력한 대중의 응원을 받기도 한다.
음악평론가로서 슈만은 아는 것이 많고 열린 마음을 가진 다른 음악가의 뛰어난 재능을 발견하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었다. 쇼팽을 천재로 소개했고 브람스를 세상에 알렸으며 무엇보다 바흐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겨서 당시 잊혀져 가고 있던 바흐를 재발견하는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 줬다.
슈만은 음악 내용과 아이디어 자체가 하나의 형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소나타나 론도 형식을 정확히 쓰는 것보다 곡의 분위기나 색채가 더 중요했다. 기존의 음악 형식인 소나타·교향곡·변주곡 대신에 ‘사육제’ ‘다비드 동맹 무곡’ ‘크라이슬레리아나’ 같은 제목으로 작품을 썼다.
어떤 작곡가보다 문학적 아이디어를 음악에 접목시키려고 했던 슈만은 ‘아베그(ABEGG)’라는 글자에 음을 연결해서 ‘아베그 변주곡’의 주제 동기인 ‘라(A), 시 플랫(B), 미(E), 솔(G), 솔(G)’을 만들었다. 피아노 모음곡 ‘사육제’에 ‘네 개의 음표에 의한 작은 정경’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네 개의 음표, ‘가(A)·내림 마(S)·다(C)·나(H)’는 자신의 이름 슈만(SCHumAnn)에서 가져온 것이다.
슈만의 음악은 문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노골적인 불협화음과 당김음 리듬,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화음의 출현, 자유로운 형식은 기존의 음악전개와 형식을 따랐다기보다 문학적 전개방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비판을 많이 들을 정도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나는 정치·문학·사람 등 세상에서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영향을 받고 그것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곱씹고 나면 거기에서 받은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오늘날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말이라 해도 믿겨지는 슈만이 남긴 말이다. 오랫동안의 독서습관에서 시작된 슈만의 독특한 작품은 당대에 잘 연주되진 않았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시대, 힙한 것에 관심을 가지는 요즘 시대와 어울리는 작곡가, 슈만. 꼭 들어 봐야 할 클래식 리스트에 넣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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