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6·25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한국인은 한반도 주변의 팽팽한 대결 구도를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의 부산에서는 한국과 유엔군 참전 22개국 대표들이 모였고, 북한의 평양에선 북한 중국 러시아가 뭉쳤다. 1945년 광복 이후 여러 변화가 있었으나 이 구도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이날의 상징적 장면은 이보다 앞선 어느 사건을 소환한다. 중국의 국공내전 때인 1946년 6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또 다른 정전협정이다.
국공내전은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이후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한판 승부였다. 국민당이 이 협정을 받아들이면서 전쟁의 물줄기가 바뀌었고, 그로 인해 중국과 한국의 운명, 나아가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다. 모두에게 ‘결정적 순간’이었다.
승부처는 만주 지역이었다. 이 시기 만주에는 일제가 세웠던 만주국이 있었으므로 일본이 항복한 뒤로는 무주공산이었다. 먼저 만주를 점령한 것은 소련군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빠른 시일 내에 만주를 중국에 넘겨주기로 돼 있어 중국의 일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만주의 중요성은 경제적 가치에 있었다. 만주 인구는 중국 전체의 9분의 1에 그쳤으나 중국에서 최대의 공업지대가 만주였다. 만주의 공업제품 생산은 중국 본토의 4배, 전력은 3배에 달했다. 게다가 일본의 병기공장이 다수 있었고 패망 후 남겨놓고 간 무기도 많았다. 결과적으로도 이 막대한 기반을 장악한 공산당이 최종 승자가 된다.
국민당에도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공산군은 군사력에서 확연한 열세를 보이며 국민당 군대에 밀려 만주 북쪽으로 퇴각을 거듭했다. 공산군의 ‘구원자’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좌우 세력의 합작을 요구한 것처럼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도 같은 화해를 종용했다. 정전협정도 그 일환이었으나 순진한 발상이었다. 훗날 등소평의 개혁개방 때 미국이 중국을 지원해 오늘날 세계 2강에 오르게 한 뒤, 뒤늦게 중국 봉쇄에 나서고 있는 것과도 겹쳐진다.
1946년 6월 공산군은 북쪽의 하얼빈으로 밀려나 패배 위기를 맞고 있었고 국민당 군대는 하얼빈에서 48km 전방까지 근접해 있었다. 곧 막바지 대공세를 시작할 시점에 국민당의 지도자 장개석은 미국의 정전협정 요구를 받아들인다. 미국이 지원 중단 등으로 압박하자 마지못해 응한 것이다. 장개석이 나중에 ‘가장 통탄스러운 실수’라고 땅을 쳤던 결정이었다.
이 협정은 공산군이 반격에 나설 시간을 벌어줬다. 이듬해인 1947년 봄이 되면서 전세는 공산당 쪽으로 역전됐다. 이 시기에 북한과 소련이 공산군에 도움을 줬다는 말은 있었으나 그 내용은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한중수교가 이뤄진 1992년 북한이 ‘김일성 전집’을 펴내면서 자세한 지원 항목들을 공개해 베일이 걷혀졌다. 김일성으로선 이렇게까지 중국을 도왔는데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느냐는 항의의 표시였을 것이다.
북한은 공산군 부상병 수만 명을 받아들여 치료한 뒤 전선에 복귀하게 해주는 한편, 공산군 병력이 북한 내부를 통해 만주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도록 길을 터줬다. 상당한 물자 지원도 이뤄졌다. 공산군에게 이보다 든든한 후방기지가 없었다.
만약 국민당이 정전협정을 단호히 거부하고 만주를 장악했다면 공산국가 중국은 없었고 북한의 6·25 남침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남한과 자유 진영의 중국 사이에 끼이게 된 북한은 김정은 왕조 체제와는 다른 길을 갔을 게 분명하다.
눈을 현대 한국으로 돌리면 무엇보다 미스터리한 일이 더불어민주당 등 좌파 세력의 친중(親中)주의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당사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균형 외교’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기대’다. 그러나 같은 ‘균형 대상’인 일본을 가열차게 몰아붙이고, 북핵에 맞선 한·미·일 공조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걸 보면 납득하기 어렵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우리의 기대치에 비해 현실성은 낮다는 점에서 그토록 맹목적인 친중 이유는 될 수 없다.
좀 더 설득력 있는 분석으로 ‘우리 안의 사대주의’가 거론된다. 중국을 2000년 이상 ‘높은 산봉우리’로 떠받들어온 풍조가 우리 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 국공내전에서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었더라도 이들이 지금처럼 중국을 숭상하고 있을까 하는 역사적 가정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좌파의 ‘중국몽’은 모택동과 사회주의 혁명을 동경하면서 품어온 이념적 지향과 환상에서 뿌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후 중국 경제의 화려한 부활도 이들의 영감을 자극했을 것이다. 한국 좌파가 교과서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자꾸 빼려는 걸 보면 남북통일 이후의 한국 체제도 중국에서 힌트를 찾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중국 국공내전 때의 결정적 순간은 한국 좌파에게도 그들의 정체성을 좌우한 결정적 순간이자, 동시에 치명적 순간이었다. 그 허망한 늪에서 빨리 헤어 나와야 한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