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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명소산책] 루소의 걸작들이 탄생한 몽모랑시
파리 북쪽 문에서 13km 지점에 있는 야생의 숲
루소가 칩거하며 ‘에밀’과 ‘사회계약설’을 집필한 곳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07 06:31:00
 
▲ 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박사
루소가 출세 가도에 오른 것은 ‘과학과 예술에 관한 담론’을 발표한 직후였다. 이 책은 30대의 루소가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는 데 크게 공헌했다. 1750년 디종 아카데미에 출전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과학과 예술의 재건이 도덕을 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루소는 “과학과 예술이 도덕을 정화하기는커녕 인간을 미덕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불확실하고 쓸모없는 지식보다 무지와 고결한 단순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과학과 예술은 인간을 허무한 존재로 만들고 도덕을 타락시키고 폭군의 멍에를 위장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높이 평가한 디종 아카데미는 루소에게 우승의 월계관을 씌웠다. 그의 에세이는 곧 널리 논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당대의 사상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적이 생겨났다. 볼테르는 루소가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귀족적 세련미를 비난하고 있다며 화를 참지 못했다. 절친인 디드로 역시 루소와는 반대 논리를 펼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파리는 점차 루소에게 ‘소음·연기·진흙’의 도시로 변해 갔다. 그는 이 도시를 탈출해야 했다. 1756년 4월9일 그는 자신의 삶과 사상을 더 잘 조화시키려는 열망으로 몽모랑시(Montmorency)로 떠났다. 이곳은 그의 후견인 중 하나인 에피네 부인의 은둔처였다.
 
▲ 앙기엥 호수에서 바라 본 몽모랑시
 
루소는 파리에 정착했을 때 생토노레(Saint-Honoré) 거리에 있는 에피네 부인의 살롱에 드나들었다. 거기서 그는 철학자·과학자·작가·예술가 등 훌륭하고 문화적인 사회 인사들을 만났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이야기했다. 이 살롱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루소·마르몽텔·뒤클로·그림·볼테르·디드로·달랑베르 등이었다. 디드로는 이곳의 단골손님이었고 볼테르는 에피네 부인의 손님들을 매료시켰다. 때로는 파리를 거쳐 가는 젊은 모차르트도 이 살롱에 들렀다. 이 살롱 주인 에피네 부인은 1742년부터 루소의 후원자가 됐다.
 
에피네 부인의 도움으로 루소는 몽모랑시로 올 수 있었다.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은 계몽주의 운동가들의 피난처였다. 루소는 숲 가장자리에 있는 에피네 부인의 집에서 한동안 지냈다. 그는 그 집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아, 부인, 정말 멋진 집이네요. 여기 나를 위해 만들어진 안식처가 있군요”라는 말로 집주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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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분노에서 벗어난 루소는 노트를 끼고 자연을 여행하며 메모를 하고 가장 보람찬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나는 매력적인 고독 속에 고립된 거주지를 갖고 있었고, 내 집의 주인이었고, 누구도 나를 통제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내 방식대로 살 수 있었다”고 적었다. 루소는 이곳을 ‘야생이 아닌 고독의 장소’로 명명했고 ‘생각 속에서 나를 세상 끝까지 데려다 준 곳’으로 묘사했다.
루소는 여기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 ‘뉴 엘로이즈’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에피네 부인과 불화가 생겨 이곳 생활을 정리해야 했다. 좀 더 조용하고 한적한 삶을 찾던 루소는 세무사 마타스(Jacques-Joseph Mathas)의 제안을 받았다. 그는 몽루이에 있는 자신의 부동산을 루소에게 소개했다. 상태가 상당히 열악했지만 임대료가 싼 작은 시골 주택이었기에 루소는 그 집을 빌렸다. 그리고 1757년 12월15일 이곳으로 이사해 자기만의 철학적 ‘구조’를 개발하기에 유리한 장소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그가 만든 정원 아래의 전망대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가두고 세상과 단절돼 집필의 나래를 펼쳤다. 곧 ‘뉴 엘로이즈’가 완성됐고 이어 ‘사회계약설’이 세상에 나왔다. 루소는 ‘사회계약설’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이 사회계약설은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 몽모랑시의 루소박물관. 위키피디아
 
또한 그는 ‘에밀(교육)’을 집필했다. 이 작품으로 몽모랑시와 철학자 루소 사이에 일정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루소는 어린이의 학교생활을 따라가며 다양한 단계를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이상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루소는 자기주도 학습을 옹호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가장 잘 배운다는 생각에서였다. 루소에게 교육자의 역할은 아이를 감독하고 아이의 경험이 잘못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교육은 사회의 규칙이나 전통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어린이의 진정한 본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책이 출판되자 환호도 컸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비난하는 쪽에선 이 작품이 모든 것을 자연 종교로 되돌리려는 목적으로만 구성됐다고 개탄했다. 특히 소르본과 파리 의회는 격노했고 이 책을 광장에서 불태웠다. 이는 유럽 전체를 분열시키기에 이르렀다.
 
루소는 결국 1762년 6월8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도망치지 않고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에게 대답할 기회를 얻길 바랐다. 하지만 콩티 왕자와 룩셈부르크 원수는 자신의 신변을 두려워한 나머지 루소에게 몽모랑시를 떠나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루소는 짐을 챙겨 스위스 이베르동으로 떠났다. 하지만 제네바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국에서 루소에게 당장 주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루소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편지를 보내 뇌샤텔 주 모티에르에 있는 프로이센 거주지로 망명을 요청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7월29일 그가 그토록 감사하고 사랑했던 바랑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도망자가 된 철학자의 신세는 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차분히 ‘고백록(Confessions)’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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