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한반도를 미·소가 분할 점령하여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되자 공산주의의 심각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와 같은 태평양동맹을 결성하거나 외부의 침략에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 간 협정의 체결, 또는 한국 방위에 대한 공개적인 약속을 미국에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결국 미국의 동의를 받아 내지 못했다.
미국 자체와 국제사회에서 휴전을 바라는 여론이 증대되어 가자 미국 정부는 휴전 정책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는데, 1951년 5월17일 NSC 48/5를 채택함으로써 한국전 종결과 휴전에 관한 지침을 정했다. 이어서 유엔군사령관의 회담 제의와 몇 차례의 사전 접촉을 거쳐 7월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최됐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자체를 반대했다. 휴전회담 개시를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6월부터 이 대통령은 휴전 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공개적으로 분단을 인정하는 어떠한 행동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반대하고 있었다. 미 국방부는 한국은 유엔군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 미국이 한반도 내의 모든 적을 격퇴해야 하는 의무가 생길 뿐만 아니라 미국이 바라지 않는 한반도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진다며 거부했던 것이다.
미국 정부의 반대를 인식한 이 대통령은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수행을 거의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던 이승만 정권이 휴전 반대를 위해 미국과의 갈등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국군의 유엔군 지휘통제 탈퇴와 단독 북진 및 반공포로의 석방 등인데, 1951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은 ‘만일 휴전이 된다면 한국군은 자유로운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며 이탈을 표명했다.
휴전 반대운동과 함께 휴전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인을 위해 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속도를 내고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 6월18일 2만7000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미국을 압박했다. 휴전협정 체결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반공포로의 일방적인 석방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미국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유일한 승부수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휴전협상이 결렬될 위기에 놓이자 미국은 휴전 이전에 한국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보내 이 대통령과 협상하도록 했다. 3차에 걸친 회담을 마친 후 7월12일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공동성명을 통해 합의 사항을 발표했다.
이승만·로버트슨 회담 결과 합의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협의하기 위해 휴전협정이 조인된 직후인 1953년 8월4일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 일행이 새로운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을 가지고 방한했다. 한국과 미국 간의 조약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 어떠한 형태든지 미국의 단독개입이 필수적이라는 한국의 입장이 더욱 절실하여 현실적으로 체결 가능한 조약에 합의했다.
한·미 간에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후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한국군의 증강 및 현대화를 위한 군사원조의 공약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1954년 6월15일 제네바 회담이 아무런 합의도 없이 폐막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북진’도 불사한다는 강경책을 천명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과 한국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전제로 북진 통일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1954년 11월17일 한미합의의사록 조인으로 7억 달러의 군사 및 경제원조와 함께 한국군은 72만 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합의의사록 도출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정부는 휴전성립과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통일정책을 견제할 수 있었고, 이승만정부는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의 팽창주의에 위협받고 있는 국가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을 수행하면서 온갖 악조건 하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할 수 있었고,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보장받기 위해 한미동맹 결성 정책을 성사시켜 국군의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킴으로써 안정된 가운데 산업화를 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향후 한반도에서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한·미 안보협력 체제하에서 한·미가 공동으로 국가적 위기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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