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가 김중업. 제주대학교에는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볼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저기 건물에 하자가 생기고 노출 콘크리트 마감의 부식이 심해 결국 철거됐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이다. 그가 한국의 훌륭한 건축가라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많은 내용이 있다. 굳이 르꼬르비제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였고 대학교수였다는 설명은 오히려 그의 작품과 그가 건축가로서 가졌던 메시지를 희석시킬 수 있다. 그는 우리의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건축가였으며 그 암울한 시대에 건축물을 통하여 시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특히 우리가 말하는 세계적인 대가들의 성향을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가 뛰어난 건축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왜 그의 지붕을 그렇게도 그의 작품에 등장시켰을까? 그것이 바로 그가 뛰어난 건축가라는 것이다.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건축가는 수없이 많은 건축물 설계를 하였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경지에 도달한 메시지와 통일감이 두드러졌다. 동일한 구조와 반복적인 표현은 프로만이 가질 수 있는 자세인데 이를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대가들의 공통점이 바로 자신만의 스타일이다. 그 스타일이 아름답고 멋진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프로의 작품에는 형태 속에 발전을 암시하는 진보된 미래의 정신이 무의식적으로 담겨져 있기 마련이다. 스타일이 중요한 것이다.
스타일은 메시지의 반복적인 표현에서 수신자와 소통을 도울 수 있으며 결국 이해를 돕는 것이다. 작품을 미적인 기준에서만 본다면 이는 실로 좁은 안목을 나타내는 것이다. 역동적인 시대와 근대를 제대로 갖지 못했던 한국의 건축에 그는 건축의 미래를 제시했던 것이다. 건축가는 형태로 말을 한다. 시대를 앞서 가고 지도자적인 위치에서 그의 건축물은 실로 침묵 속에서 조용한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오해하는 실례를 범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그의 메시지를 보았다면 우리의 건축은 지금보다 더 큰 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그는 왜 지붕을 선택했는가? 우리의 전통 처마는 중국처럼 강렬하지도 않고 일본처럼 수평도 아니다. 버선의 코처럼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내부공간에 빛을 유입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는 건축가이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시기에 김중업은 건축의 시작에서 한국적인 스타일을 선보이고자 한 것이다. 동양에서 지붕이 갖는 의미는 서양과 다르다. 서양의 지붕은 처마가 없다. 처마가 없는 지붕은 기능적인 역할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처마는 건축물을 덮는 그 이상이다. 이는 근세에 서양의 건축물에 기둥이 하는 역할과도 같다. 서양 건축의 발달은 공간의 발달이다. 폐쇄된 공간이 자유를 찾는 과정이 서양 건축의 역사라면 동양은 영역의 발전이다.
서양의 내부 외부의 명확한 구분에 비하여 한국의 영역은 ‘울’의 존재로 중간 영역을 갖고 있다. 이 중간 영역은 내부 외부에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 않기도 한다. 이렇게 상반된 영역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의 특징이다. 처마에도 그런 특징이 담겨있다. 김중업은 이러한 인간적인 영역을 보았으며 이것을 우리의 건축에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우리다운 컨셉이다. 그의 지붕 존재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김중업의 지붕을 이해하려면 먼저 독일의 월터 그로피우스를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는 독일의 건축에 미래정신을 담은 형태를 선보이면서 유럽이 과거에 갖고 있었던 지성과 감성의 분리에서 통합을 이룬 건축가이다. 대부분의 건축가가 바닥과 벽의 디자인에 집중할 때 지붕이라는 요소를 만들어 낸 진보된 표현이다. 특히 그로피우스가 파구스 공장을 통하여 모서리를 제거하여 벽을 구조체가 아닌 스크린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선보였다면 김중업은 모서리의 연속성을 통하여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김중업은 과도기에 있었다. 한국의 현대건축을 이끈 건축가가 김중업 말고 우리에게 또 한 사람 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건축가이지 훌륭한 건축가는 아니다. 그는 한국의 현대건축을 이끌지 못했다. 그의 건축은 신고전주의에 가깝다. 그가 김중업과 다른 것은 그 시기에 주어진 기회를 한국 건축을 위하여 쓰지 않고 자신의 기회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형태구성의 기본이 되는 선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게 하는 건축가이다. 어느 나라에나 선구자적인 건축가가 있다. 선구자적인 사람은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한다. 김중업은 자신의 건축물에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일관된 메시지를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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