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 옷을 벗고도 수치심이 안 들었어야 하는데… 기순이가 용기 있게 옷을 벗긴 했어도 시선은 방바닥을 보고 있었죠. 상대와 눈을 마주칠 만큼 당당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 저는 똑똑히 봤어요. 기순이 벗은 몸을 감상하고 있던 남자들의 표정을. 첫 번째 윤간은 기순이 선배들 앞에서 옷을 벗었을 때 일어난 거라고요. 음탕한 눈빛으로 기순일 겁탈했어요. 이죽거리며 지들끼리 귀엣말을 나누더라고요. 알게 뭐야, 기순이를 첫 타자로 매긴 건지. 희숙의 손떨림은 줄어들었다. 깊게 심호흡하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희숙은 그 자리에 없었음에도 마치 책임자 같은 태도로 임했다. 제 차례가 오기 전에 옷 벗는 의식을 멈췄어요. 저는 제 방으로 돌아가서 그다음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몰라요. 며칠 있다가 자기 집에서 방에 연탄가스 피워 놓고 자살했다고. 승연은 기순이 생각에 목이 메었다. 자살할 애가 아닌데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궁금했어요. 나중에 기순이 윤간당한 사실을 알게 됐지요. 윤간한 놈 중 한 명이 자기 입으로 기순이 겁탈한 얘길 떠들었나 봐요. 자기가 숫처녀 처음 따먹은 행운아라고.
기순이 일기장에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부터 나는 자유롭지도, 해방되지도 않았다’고 써 놨어요. 윤희숙은 담담한 척했다. 겁탈한 놈 중 한 명이 ‘자기가 숫처년 처음 따먹은 놈’이라 했다는 대목에선 참기 힘든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희숙은 자길 찾은 이유가 뭔지 물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였다. 승연은 물 한 컵을 단숨에 마시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강윤희, 아세요? 한양대 다녔던. 그 여자가 시작했어요. 제 딸한테 쓸데없는 얘길 했더라고요. 잊고 살았는데, 악몽은 갚지 않은 외상처럼 절 따라다니며 괴롭혔어요.
기순이가 죽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김태주 선배까지 죽고 나서 저는 제 과거를 리셋했어요. 근데 제 과거가 외상인 줄 몰랐어요. 갚아야 리셋이 되더라고요. 그 잘난 혁명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담보했다는 걸 알았다면 전 안 했을 거예요. 그래서 희숙 선배를 찾았어요. 우연히 TV에서 변태섭이란 사람을 봤고, 그가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하더군요. 우리 사회에서 관용이 사라졌다나. 화가 났죠. 당신들의 관용이란 게 남의 죽음에 무심한 거냐고. 변태섭이란 말에 희숙의 흰자위가 번뜩였다. 희숙이 비웃었다.
“씨발놈, 관용 좋아하시네. 나눠 먹고 공유하는 거 좋아하는 게 지들 관용이지!”
희숙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올 줄은 상상 못 했다. 희숙은 분을 참기 힘든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이어 라이터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나갔다 올게. 담배 한 대 피워야 할 것 같아서. 희숙은 담배와 라이터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승연은 여전히 희숙의 행동에 적응되지 않았다. 희숙이 놓고 간 휴대폰에서 진동벨이 울렸다. 덜덜덜덜, 덜덜덜덜. 발신자 이름이 ‘변태 새끼’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