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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37] 소모품의 죽을 순번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7-02 06:30:23
 
 
 
“네 아버지 그리된 건 유감이야, 내 잘못 아니다. 네 잘못도. 아무리 화해할 시간이 없었대도 말이야. 태주는, 태주 소식은 나도 충격이었어. 태주가 죽어선 안 됐거든. 그러기에 태주는 한도 많고 할 일도 많고… 죽을 순번도, 죽을 자격도 안 됐는데. 하긴 자격이 어딨냐. 어차피 소모품인데.”
 
승연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말이긴, 영등포구청 부정투표함 사건. 그거 태주가 택(擇) 받고 간 거야. 부정선거라고 우기고 한 사람 죽었어야 했는데 그게 태주가 된 거지. 원래 죽어야 할 역할은 인자들이 하거든. 희숙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승연의 표정을 보자 부연 설명했다.
 
“인자가 뭐냐면, 일종의 행동대장인데 죽는 역할이기도 해. 박철규처럼 죽고 싶어 안달 난 애들 한 명 뽑아서 보내지. 근데 태주여서 의아했어. 태주는 똑똑해서 알았을 거야. 자기도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단 것을. 나도 그랬는걸 뭐. 여자들은 제아무리 날고 긴대도 기쁨조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성적 자기 결정권? 그런 거 없어. 결정은 그들의 소관이지. 변태 새끼는 나와 결혼한 이후로 더 가부장적이더라고. 그거 타파하라고, 여성 인권 어쩌구 졸라 외쳤던 놈들이 조선시대 양반놈들 이율배반보다 더 했으면 했지, 덜 하지 않아!”
 
승연은 태주가 지시받고 영등포구청에 갔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변태 새끼가 가부장적이든 말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슬픔이 분노로 변하는 데 진실보다 자극적인 것은 없었다. 과거가 바뀌지 않는다 해도, 진실을 알고 난 전후는 달랐다. 태주의 죽음은 누군가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승연은 화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저 목이 말랐다. 느린 속도로 맥주를 들이켰다. 김태주, 죽기 사흘 전에 저랑 있었어요. 희숙은 굳은 얼굴로 승연을 바라봤다. “둘이 사귄 사이였니?” 승연은 대답 대신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태주 씨가 제게 처음이었어요. 제 결심을 바꾼 것도 처음, 미래를 생각하게 한 사람도 처음, 과거 속을 유영하게 한 사람도 태주 씨가 처음이었고. 현재만 없네요. 맞아요, 태주 씨는 죽어선 안 될 사람이었어요. 죽을지 알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들러리란 건 알았을 거예요. 저보고 가족 품으로 돌아가라 했어요. 그도 운동을 끝내려고 했을 거예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자본 활동이라고 했거든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요. 취직하겠다고 했는데, 취직해서 첫 월급 받으면 어머니 내의 사드리고 제게 실반지 하나 해 준다고 했는데… 죽었네. 아니, 죽인 거네. 내가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한 거 알면서 죽어선 안 되지.” 승연은 횡설수설했다.
 
“담배 한 대만 줘 봐요.”
 
희숙은 피울 줄 모르면 시작하지 말라고 했다. 고통 해결하려 몸에 자극 주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말까지 곁들였다. 승연이 피식 웃었다. “피울 줄 모르면 배우면 되고 고통을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고통을 잠시만 잊으려는 거예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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