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코까지 맞추면서 시간 끄는 버릇이 돌아온 걸 보니, 기분이 나쁜 것 같지 않았다. 승연은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수정이 ‘엄마, 배고파!’ 할 타임이었다. 수정이 배고프다며 거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승연은 뛸 듯이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럴 땐 딸한테 뭐 먹고 싶은데? 만 물어보면 된다. 그간 수정이와의 어색한 시간을 기꺼이 견딘 보상은 수정이의 수다였다. 수정은 승연이 만든 햄파이를 먹으며 아이돌 얘기, 드라마 얘기, 학원 강사 얘기 등을 늘어놓았다. 규칙도 순서도 없는 수다였다.
수정이 승준이 얘길 꺼냈다. “엄마, 이번 모의고사에서 승준 성적이 10등이나 밀렸대. 승준 엄마가 속상해서 나한테 그랬어. 너는 몇 등 했냐고.” 승연은 승준 엄마 얘기에 귀가 쫑긋했다. “그래서 너는 뭐라 했어?” “내가 뭐라긴. 나는 지난달하고 똑같다고 했지.”
승연은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수정이 승연의 얼굴에 퍼진 옅은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엄마, 승준이 성적 떨어진 거, 속으로 좋지? 깨소금 맛이다! 하고 싶은데 참는 표정인걸?” 승연은 딸에게 속마음이 들켜서 억지로 웃고 말았다.
“얘는, 승준이 성적 떨어진 것보다 승준이 성적 땜에 속상해 할 승준 엄마가 고소해서 그렇지. 거, 내 딸한테 이상한 소리나 하고.” 수정이 승연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엄마한테 말해 봐. 뭔가 숨기지 말고.” 수정은 그제야 털어놓았다. “사실은 승준 엄마가 지난번에 말한 거, 미안하대. 엄마는 아무 상관 없는데 엄마도 운동권이었던 것처럼 말해서 미안하다 했어.” 승연은 수정의 손을 잡았다.
“수정아, 운동권이던 아니었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그 시절은 대학생들이 민주주의 하자고 학교 수업 거의 못 하고 거리로 나섰던 때였어. 엄마도 다른 대학생처럼 가두시위도 하고 돌멩이도 던졌지. 불의를 못 참고 정의를 주장하는 게 학생들 몫이잖아. 근데 어느 순간 내가 무엇 때문에 시위하는 거지? 목적이 뭐지? 뒤돌아봤어. 스스로 설득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멈췄어. 그리고 무슨 의례니 하는 얘기 말이야 다 믿지 마.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를 듣게 되어도 직접 보지 않고서 섣불리 일반화하는 건 위험한 생각이거든. 인간의 기억엔 함정이 많아. 진실과 팩트는 다른 거고.”
수정과 서먹했던 감정을 풀고 나니 승연은 밀린 숙제 하나를 해결한 느낌이었다. 승연은 승준 엄마한테 전화했다. 지난번엔 제가 좀 흥분했지요. 승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승준 엄마는 자신이 경솔했다고 말했다. 그러곤 승준이 성적 떨어진 게 수정이한테 몹쓸 말을 해서 그리된 것 아닌가 하며 삼신할미 부적 같은 소릴 해댔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자기가 성형 수술하고 나서 좋은 일만 생겼다고 말했다. 취직됐고, 변호사 남편을 만난 건 성형술 덕분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통령 부인도 성형 수술해서 승준 엄마처럼 좋은 일만 생기지 않겠느냐는 반문에 승준 엄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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