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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路 동서고금 <58> 이란·페르시아
임명신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23 00:02:50
이란과 페르시아는 동일한 나라를 지칭하지만 역사적 함의가 다르다. 오랜 세월 페르시아로 불리다 1935년 레자 팔레비(1878~1944) 왕 시절 각국에 공식 요청해 국호 ‘이란’이 확정되었다. 페르시아란 현 이란 남부의 지역 이름 ‘파르스’에서 기원한 것인데, 그리스어·라틴어를 거쳐 현재의 발음으로 굳어졌다. 7세기 이래 한자 음차된 ‘파사(波斯)’, 한글 성경 속 ‘바사’가 바로 페르시아다. 
 
인류 정신사에 심오한 영향을 끼친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교, 페르세폴리스 유적, 사이러스(고레스)·다리우스(다리오) 대왕 등 고대 유산과 고급 카펫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와 관련되면 브랜드 이미지가 더해진다. 내부적으로만 쓰이던 단어 ‘이란=아리안(아리아 사람·언어)의 땅’이 부상한 것은 20세기 전반의 일이다. 카자르 왕조(1794~1925)를 밀어 내고 쿠데타로 집권한 팔레비 왕조의 ‘국민 만들기’ 구심점 필요성과 맞물려 정치적 사명을 띠고 부활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단군조선이 어떻게 발굴돼 유행했는지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다. 
 
아리안(산스크리트어로 ‘고귀한 자’)에 대한 서구인들, 특히 아돌프 히틀러 시대 독일의 로망이 대단했던 것도 주목된다. 유럽의 후진국이라는 열등감에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상처가 더해진 결과다. 고대 인도·이란계 언어 사용자들을 지칭한 문화 개념 ‘아리안’에 꽂힌 나치는 19세기 언어학이 발견한 산스크리트어·페르시아어·라틴어·게르만어의 유사성을 우생학적 인종 이론으로 확장시켜 ‘독일인=아리안의 후예’를 주장했다. 이란이 나치의 악마적 행보에 가담하진 않았으나 ‘아리안 형제국’으로서 일정한 유대감을 보인 것은 팩트다. 당시 이란의 1위 무역국이 독일이었고 독일은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대거 파견해 이란에 체류시키기도 했다. 
 
1979년 혁명 이후 ‘반(反)서구의 화신’ ‘신정(神政) 이슬람’이 된 이란은 아리안 선민의식이 심화된 것 같다. 그런데 혈연적·언어적 계보도 다른 아랍의 일부로 흔히 오해되니 분통 터질 노릇이다. 이란은 7세기에 이슬람 아랍군에 정복당한 후 기존의 쐐기문자 대신 아랍문자를 쓰게 됐으나 고유의 언어·문화·역사 의식을 지켰다. 심지어 ‘아랍이 가져온 종교를 우리가 문명화시켰다’는 자의식 위에 ‘아랍=서구에 종속된 석유 졸부 절대왕정’ ‘이란=독립적 공화국’ 식의 눈으로 정복자를 내려다본다. 무식·무교양을 꼬집을 때 “아랍인처럼 굴지 말라”고 한다니 압권이다. 
 
“우리가 제국을 건설할 때 오아시스 주변에서 약탈을 일삼던 아랍 부족들, 그러나 이젠 부유한 이슬람 형제국”… 이런 역사적 반전이 이란의 심리를 한층 복잡다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대부분 수니파인 아랍국들에 대해 시아파 이란은 정통성과 도덕적 우월감이 강하다. 유대인 역시 타락한 세속 세력으로 간주한다. 현실이 비참할수록 트라우마성 집단 무의식은 극단적 태도를 낳곤 한다. 먹고살기 힘든 가운데 ‘미국·이스라엘에 죽음을’ 안긴다며 핵개발에 나선 것도 사악한 서구문명의 상징인 이들을 심판한다는 명분에서다.
 
팔레비 왕조의 몰락 배경으로 1960·70년대 석유 붐·경제 성장의 수혜가 소수에 집중된 점, 전통가치 붕괴의 위기감 등이 꼽히지만 이는 모든 근대화(산업화) 초기의 보편 현상 아닌가. 그런 고비를 무사히 넘긴 대한민국과 어떻게 달랐는지 세계사적 비교연구 주제로 삼을 만하다. 
 
한편 현 중동 사태의 여파가 한반도 지정학까지 뒤흔들 조짐이다. 중국의 최대 에너지 공급자이자 일대일로 핵심 파트너국 이란이 치명상을 입었고, 최고지도자(아야톨라)를 향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언제든 표적 살해할 수 있다. 빨리 나와서 협상하라”는 메시지는 북한 김정은에게도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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