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Pearl Harbor) 공격은 일본 정부와 군이 무려 9년 동안 진행한 관련 스파이 공작에 따른 정보 수집, 훈련 및 예행연습, 기만, 그리고 철저한 전략에 따른 광범위한 계획의 산물이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많은 스파이들의 활약이 있었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했던 하와이 주재 일본 영사관 부영사 모리무라 타다시(森村 正·본명 요시카와) 외에도 특히 진주만 공습 전 일본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던 독일인 가족의 활동이 결정적이었다.
진주만 가족 스파이… ‘8개 눈의 스파이(The 8-Eyed Spy)’
1942년 2월21일 진주만 공습이 끝난 후 76일 만에 하와이 거주 독일인이 간첩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부인과 딸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누구인가?
버나드 오토 줄리어스 쿤(Bernard Julius Otto Kuehn)이다. 쿤은 1895년 7월25일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 어린 나이로 독일 해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포로가 되었다. 2년 넘게 영국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부상기에 나치당 당원이 되어 1928년부터 1933년까지 활동했다. 당원이 되기 전에 의과대학에 다녔지만 경제난으로 중퇴했다. 이 무렵 그는 아내 프리델를 만나 결혼했다.
쿤은 나치독일의 선전부 장관인 괴벨스(Goebbels)로부터 하와이로 이주하여 일본 정보기관에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의 딸 루스가 어린 나이에 괴벨스의 정부(情婦)가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즉각 받아들였다. 쿤은 당시 2만5000달러(현재 가치 50만 달러)를 받고, 1935년 8월15일에 가족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사했다. 쿤은 거액의 상속을 받아 하와이로 이주한 전직 의사로 행세했다. 그는 3채의 부동산을 매입했고 트럭과 농장도 사들였다. 그리고 커피 수입 사업을 이어갈 만큼 충분한 재원을 가지고 정착하는 양 위장했다.
쿤의 가족은 겉보기에 하와이에서 평범한 미국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온 가족이 스파이 활동에 동원되었다. 그의 가족은 40세의 쿤, 같은 또래의 아내(프리델), 17세의 딸(루스, 괴벨스 어린 애인) 및 6세의 아들(한스)이다. 가족 구성원이 모두 간첩 활동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8개 눈의 스파이(The 8-Eyed Spy)’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딸 루스는 호놀룰루에서 가장 싸고 멋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용실을 열었다. 고위 군 간부의 아내들이 주 고객이었다.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엿들으며 미 해군과 관련되는 첩보들을 주워 담았다. 또한 루스는 수많은 미군 장병과 깊게 교류하며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6세의 아들 한스도 스파이 활동에 동원되었는데 인류역사상 가장 어리고 가치 있는 스파이라고 평가된다. 쿤과 그의 아내는 어린 아들에게 미 해군 수병복을 입히고 해안가나 항구를 산책시키면서 미국 함선과 잠수함을 알게 하고 중요한 선박을 인지하는 훈련까지 시켰다. 특히 함선의 특이한 것을 관찰하고 기억하도록 해 질문할 내용까지도 숙지시켰다. 정박한 군함의 장병들은 ‘꼬마 수병’을 승선시켜 함선들을 둘러보게 하고 똑똑한 꼬마가 질문하는 내용에 대해 친절히 답변해 주었다. 이때부터 한스의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그의 나이 11살이었다.
쿤은 가족들이 광범위한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동안 마을 곳곳을 누비며 인맥을 쌓았다. 이웃 주민들은 그들 가족을 하와이 역사학과 학생이나 발명가로 알고 있었다. 한스가 해군기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관련 보고를 받았다. 남편과 딸, 어린 아들이 수집한 정보들은 부인의 섬세한 필체로 기록되었다.
1941년 10월 말 모리무라 하와이 주재 일본 영사관 부영사와 독일 정보요원 쿤이 첫 만남을 가진 후 이 라인을 통해 정보를 전달했다. 당시 키타 하와이 주재 일본 총영사는 모리무라를 불러 ‘찢어진 종이 한 장’과 ‘현금 1만4000달러(현재 가치 32만 달러)가 든 봉투’를 건네주며 오아후 섬 동쪽 해변가의 한 별장에서 누군가를 접선하라고 명령했다. 그 집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자신의 종이와 똑같은 찢어진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바로 독일인 쿤이었다.
쿤과 모리무라는 전달 신호를 약정했다. 일본 영사관에서 모리무라가 쌍안경으로 지켜보는 동안 쿤은 칼라마 별장 다락방에서 그에게 암호화된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은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무선 통신에 의존하지 않고 서로가 구축한 신호를 통해 정보를 교환했다. 이 고대 등불 신호 체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쿤은 총영사 키타에게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 함선과 잠수함에 불빛, 불, 무전기, 심지어 옷가지를 걸어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 계획을 설명하는 전문은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해독되었지만 이전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하와이 군지휘관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FBI와 군 정보요원들의 추적
1939년부터 하와이 주재 FBI 요원들과 군 정보국 요원들은 독일인 쿤이 직업도 없고 뚜렷한 수입원이 없음에도 두 채의 집을 소유하며 미군 장교들에게 접근하여 호화롭게 접대하고 교류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추적, 조사하기 시작했다. FBI가 쿤에 주목한 것은 1939년 2월11일 FBI 국장 에드거 후버에게 보낸 비밀 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어 유창, 특히 군 장교들을 호화롭게 접대, 명확한 수입원 없음, 2채(후에 3채로 밝혀짐)의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중 하나는 매우 넓음. 하와이 체류 기간과 거주 이유는 불분명함. 히틀러를 교묘하게 변호”라고 적혀 있다. FBI와 군 정보국 요원들이 쿤의 행보에 의구심을 품고 계속 조사했으나 그의 스파이 행위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FBI 파일에 의하면, 쿤은 ‘빨랫줄에 걸린 침대 시트, 지붕 창문의 조명, 자동차 헤드라이트, 돛에 별이 달린 배’ 등을 기반으로 코드를 만들어 냈다. 또한 쿤은 하와이 해안 근처의 일본 잠수함에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모두 고안된 난해한 신호 시스템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오후 9시부터 10시까지 오아후에 있는 그의 집 지붕창에 비치는 불빛은 미 항공모함이 출항했음을 의미했다.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에 라니카이 해변에 있는 그의 집 빨랫줄에 걸린 린넨 시트는 전투 부대가 항구를 떠났음을 의미했다. 그는 총 8개의 암호가 있었고 각 암호는 다양한 조합으로 사용되었다. 진주만 공격 5일 전 쿤은 하와이 해역에 있는 모든 미국 함선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전달했다.
쿤의 스파이 활동 덕분에 일본은 1941년 12월7일까지 진주만에 대한 모든 정보를 거의 다 갖게 되었다. 쿤이 교신에 사용한 복잡한 신호 체계는 진주만 공격 후에야 해독되었다. 이는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지만 공격 당일 이후 군 정보기관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 FBI 요원들과 군 정보국 요원들은 쿤을 간첩 용의자로 지목했다. 일본 영사관을 경비하던 현지 경찰은 영사관 직원들이 종이 뭉치를 태우려 하는 것을 발견하고 압수했는데, 그 문서 중에는 쿤이 전달한 미 함대의 이동 경로에 대한 신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미 정보당국은 진주만 폭격 당일 일련의 신호를 언급한 일본 문서를 입수했다. 모든 단서는 쿤을 가리켰다. 쿤은 체포 직전까지도 비좁은 다락방에서 쌍안경으로 미 함대의 동향을 관찰하여 일본 영사 모리무라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공습으로 깊은 잠에서 깨어난 미군 정보부는 마침내 오두막에서 깜빡이는 신비로운 불빛을 발견하고 이를 추적하여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2월8일 쿤의 가족을 체포했다.
쿤는 암호화된 신호를 일본 영사에게 보낸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진주만 공격 76일 후인 1942년 2월21일 쿤은 군사재판에서 간첩 혐의가 인정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일본과 독일의 간첩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50년의 중노동 형으로 감형되었다. 가벼운 형을 선고받은 쿤의 부인은 아들과 함께 독일로 돌아갔고, 딸 루스 역시 3년간 복역 후 1945년 독일로 추방되었다. 쿤은 1955년 독일로 돌아와 1956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 본토에서 일본 스파이로 암약한 톰슨과 판스워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작전인 Z작전은 1940년대에 본격적으로 실행되었지만 계획은 1932년부터 시작되었다. Z작전을 입안하여 실행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해군 제독은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부터 미 해군에 대한 스파이 공작이 본격 전개되었다.
1930년대 미국 본토에서 일어난 두 건의 일본 스파이 사건이 이를 확인해 준다. 하나는 전직 해군 수병인 해리 토마스 톰슨(Harry Thomas Thompson, 1909–1960) 사건이다. 톰슨은 술, 과소비, 동성애 탐욕 때문에 해군에서 제대한 후 1934년부터 주미 일본대사관의 무관에게 해군 관련 정보를 제공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느슨한 보안을 악용하여 수석 예비역의 해군 정장을 입고 미군 기지와 함선에 드나들며 정보를 입수했다. 그가 일본에 제공한 정보는 32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새로운 순양함 USS 펜사콜라에 장착된 8인치 함포에 대한 포술 매뉴얼과 보고서, 미 해군 전함과 순양함의 중요한 분기별 근무 일정과 주 함포, 어뢰 및 관련 정보, 230쪽 분량의 미 해군 포병학교 교본 등이다. 이는 고스란히 일본에 넘어갔다. 그는 결국 해군 정보국(ONI)에 의해 체포되었고 1936년 간첩죄가 인정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하나는 예비역 해군 소령 존 세머 판스워스(1893-1952) 사건이다. 판스워스는 1915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애너폴리스 대학원과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항공공학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1927년 해임되기 전까지 미 해군 정찰함대 소속 항공대인 제6전대 대장이었다. 그는 지속적인 음주와 도박으로 부사관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이를 갚지 않아 기소되었는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위조 진술서를 제출한 혐의로 강제 전역되었다.
그 결과 6년간의 음주 생활이 이어졌고 결국 경제난 때문에 일본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 해군과 항공대에 대한 각종 정보를 일본에 전달했다. 해군정보국(ONI)이 도청한 무선 메시지에서 그의 코드명이 K로 확인되었다. 한때 해군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장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던 판스워스는 1937년 2월 “미국에 해를 끼치는 데 사용하려는 의도로 외국 정부, 즉 일본에 국방 관련 문서, 암호 책, 사진, 계획을 전달하고 전송한” 혐의로 유죄가 인정되어 11년 형을 선고받았다. 1952년 59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이 두 사건의 핸들러(handler, 공작관)는 주미 일본대사관 무관 이치미야와 야마키 해군 중령이었다. 그는 톰슨이 체포되자 일본으로 급거 귀국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스파이 공작의 역할과 중요성을 명백히 보여주는 전형(典型)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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