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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권 파워’가 세계 2위로 전 분기보다 한 단계 올랐다.
글로벌 투자 이민 및 시민권 통합 컨설팅 회사인 헨리앤파트너스가 공개한 ‘헨리 여권 지수(Henley Passport Index) 2025’에 따르면 한국 여권은 전 세계 190개국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 2위를 차지했다. 일본과 동률이다. 1위는 싱가포르로 193개 나라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
헨리앤파트너스는 매년 전 세계 199국의 무비자 협정 체결 현황을 분석해 그 나라 여권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헨리 여권 지수’를 발표해 왔다.
그동안 중국은 한국에 비자를 요구해 왔으나 2024년 11월부터 2025년 12월31일까지 한시적으로 무비자 방문을 허락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 올해 9월29일부터 9개월간 한시적으로 중국 단체관광객을 대상으로 무비자 제도를 시행 중이다.
여권(passport·여행증명서)은 해외여행자의 신분과 국적을 증명하는 공식 문서다. 여권 파워를 결정하는 첫 번째 요인인 비자(입국허가증명서)는 방문 국가와 여행 목적에 따라 발급 여부가 결정된다. 어떤 나라에는 무비자 혜택을 주지만 어떤 나라에는 비자 소지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권은 국가를 막론하고 해외여행자라면 무조건 소지하는 게 기본이다.
여권이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해외로 떠나는 비행기조차 탈 수 없다. 여행지에서 여권은 현금보다 더 소중할 수 있다. 여권을 분실했다간 그대로 국제 미아가 되기 때문이다.
여권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에 편지 형태의 통행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한나라 때도 ‘전(傳)’으로 불리는 통행증이 있었다. ‘전’에는 신체 특징을 기록해 현대의 사진처럼 외모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구약성경에도 여권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느헤미야 2장7절에는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450년경 페르시아 제국 시기 아르타세르세스 1세의 신하였던 느헤미야가 유대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자 왕이 강 건너 땅에서도 효력이 발휘되는 문서를 작성해 준다.
근대적 의미의 여권이 시행된 때는 15세기다. 잉글랜드의 헨리 5세(1386~1422)는 1414년 자국민이 타국을 여행할 때 안전을 보장하는 신분증을 발급했다.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유행하던 그랜드투어 때 여권이 큰 쓸모를 발휘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여권이란 게 나라마다 규격이 다르고 기록 내용에도 차이가 있어 지금만큼의 권위는 갖지 못했다.
20세기 들어 국제 여행이 빈번해지면서 보편적 여권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때맞춰 사진 기술의 발달로 여권에 얼굴 사진 넣는 게 필수가 됐는데 영국인들은 이를 ‘비인간적 처사’로 규정했다.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도 여권이 개인의 자유를 규제한다며 분개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한때는 범죄자를 떠올렸을 때만 상상할 수 있었던 굴욕이 이제는 여행자에게도 부과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그레이션 입국심사대에 여권을 내밀고 카메라 렌즈와 눈을 맞추고 서 있으면 영락없이 잠재적 범죄자가 된 느낌이 든다.
매서운 눈초리의 심사관이 사진과 실물을 대조하면서 ‘영어로’ 왜 왔냐, 얼마나 있을 거냐, 어디에 묵을 거냐 캐듯이 물어보면 괜히 입술이 마른다.
한국은 2020년 1월 순위에서 3위를 기록한 뒤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다가 2위까지 올랐다. 공동 3위는 오스트리아·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노르웨이·포르투갈·스페인이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 간에는 이동이 자유로운 편이지만, EU 회원국이 아닌 유럽 국가의 경우 한국보다 무비자 입국 가능 국가 수가 적다. 또 불법 체류나 범죄 연루 가능성이 높은 나라는 유럽이라도 여권 파워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냉전 이후 주변국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종교에 중립을 지켰다. 전자 여권 시스템의 도입으로 여권의 보안성과 신뢰성을 확보한 것도 무비자 혜택을 누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한국이 세계 2위를 찍는 동안 북한의 여권 파워는 93등에 머물러 있다. 무비자 입국 가능 국가 개수도 40개국에 불과하다. 놀라운 것은 북한은 전 세계 어느 국가와도 무비자 협정을 해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저한 폐쇄 국가다.
일본은 여권 파워가 한국과 동일하지만 러시아를 무비자로 방문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은 무비자로 러시아 입국이 가능하다. 반대로 2024년 10월까지 한국은 중국에 무비자 입국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가능했다.
여권은 해외여행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자유로운 이동과 규제 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소지자를 작은 수첩 안에 가둠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국가 공동체의 재소자로 만들기도 한다.
지금은 한국이 세계 최상위 여권 파워를 누리고 있지만 이 영화가 영원하다고 할 수 없다. 미국과의 외교적 불협화음과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정국이 여권 파워에 미칠 영향이 심히 우려스러운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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