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0은 유령 같은 수다. 유령은 부재하는 것 같으나 존재하고, 그 존재가 또 흐릿한 모호성을 띤다. 0도 그렇다. 0은 없음의 상태를 표함으로써 그 없음을 가시화한다. 없음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 그 없음은 진정 없는 것인가? 0이 생각보다 간단한 수는 아닌 이유다. 어쩌면 0은 자기 속에 무수히 많은 존재들을 배태하고 생산하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뭇 존재는 각자의 고유한 파장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0속의 다채로운 빛깔들이 섞이면서 상쇄되는 결과로서 0의 투명한 중립적 상태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예 허무하지는 않으리라.
박준호 감독의 영화 ‘3670’이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0의 그 기묘한 복잡성에 있다. ‘367n’은 남성 동성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종로 3가 지하철역 6번 출구 오후 7시에 n명이서 만나자는 의미를 지닌 일종의 은어다. 탈북해 남한에서 다소 외로이 살고 있던 남성 동성애자 주인공 철준은 동갑 동성애자 영준에게서 이 은어의 의미를 배운다. 영화 제목에 쓰인 앞의 세 숫자가 지닌 명확한 지시성은 0이 지닌 불명확한 의미를 한층 뚜렷이 드러낸다. 심지어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의 동성애자 친목 단체 소통망에 ‘367n’이 응용된 메시지들이 입력되는 영화 속 장면들 중, 그 어떠한 장면에서도 n의 자리에 0이 입력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물음표가 텅 빈 머릿속에 생긴다. 0이 없는 영화인데, 왜 그 제목에 0이 있을까?
사실, ‘3670’은 온갖 0들로 충만하다. 0을 특정 수치로만 고정시키지 않고 실존과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 적용한다면, 零은 사회 내에 비가시적으로 존재하는 靈들을 그러모은 상징적 수로 재측정될 만하다. 이 관점은 탈북 남성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이 영화를 분석하는 데에 특히 요긴하다. 철준의 그 이중적 소수 정체성과 함께 영화 안의 타 요소들이 비존재(非存在)의 상태에 연관되는 양태를 폭넓게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 인물들의 동성애 성향과 관계가 카메라의 시선에 어떻게 잡히는지 보면, ‘3670’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다.
영화는 철준이 한 남자와 어두운 방에서 육체관계를 갖는 쇼트로 시작한다. 이 어두컴컴한 장면은 철준의 동성애 성향을 선제적으로 확실히 보여줌과 동시에 동성애자들이 사회 내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암시한다. 성 정체성에 관한 사회의 보수적 태도가 이전보다 유연해진 부분이 있어서 자기의 성적 성향을 공개하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성애 외의 다종다양한 성 정체성을 공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움도 사실이다.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비밀스럽게 음지에서만 관계의 욕구를 해소하는 동성애자들은 사회 안에서 존재와 부재가 오버랩되는 회색 지대를 점유한다고 감지된다.
철준은 영화 첫 장면에서 성관계를 가진 남자가 알려준 회색 지대, 남성 동성애자 술자리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철준은 그 음지에서 동갑내기 영준과 러브샷을 마시게 된 일을 계기 삼아 영준과 애틋한 친구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둘은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오해를 경험한 끝에 쓰라리게 이별하고 만다. 누구에게나 타인은 절대적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온다. 단 한 순간도 그의 인생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일 터이다. 탈북에 완전히 성공하기 전의 북한 주민들에게는 남한이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요, 남한 주민들에게는 북한이 그럴 것이다. 철준에게는 미지의 영역이 더 많다. 영준의 회상을 보여주는 플래시백 장면은 영준의 거짓말 뒤에 숨겨진, 철준에 대한 호감을 영원한 미지로 남겨둔다. 철준이 남한에서 입학하게 된 대학은 곧 경험할, 설레는 미지다. 그가 탈북 과정에서 밟게 된 지뢰밭에서 지뢰가 안 터지도록 보호했다고 간증한 기독교의 신도 미지의 타자 아닐까?
철준이 편의점과 버스에서 타자들이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을 유심히 보는 것은 그래서 눈에 띈다. 이어폰을 보는 철준의 시선을 시점 쇼트로 처리해 그 이어폰을 클로즈업하는 촬영 기법은 그의 내면에 자연스레 이입되는 효과를 만든다. 철준과 영준이 이어폰을 통해 외부와 차단돼 세상에서 혼자가 된 듯한 기분에 관해 나누는 대화도 외부의 존재와 소리를 소거해 자신의 존재만을 느끼는 외로움에 연결된다.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 편의점에서 일하는 철준의 귀에도 이어폰이 꽂힌 이유 또한 결국 외로움이리라. 어학연수 때문에 캐나다로 떠난 영준이 이제는 곁에 없으니.
혼자 있는 철준을 담은 장면들이 영화에 많은 것은 그가 느끼는 외로움을 담담하게 전한다. 영화는 철준의 시선에 입각한 시점 쇼트들뿐만 아니라, 그가 떨림이나 울분처럼 일렁이는 감정을 느낄 때의 뒷모습을 정면으로 담은 쇼트들도 많이 보여준다. 전자가 그를 향한 공감과 몰입을 유도한다면, 후자는 그에 대해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두고 그의 마음을 찬찬히 헤아릴 수 있게끔 돕는다. 양자의 균형은 이 영화가 과도한 연민이나 건조한 관찰로 편향되지 않는 데에 이바지했다.
조유현의 연기도 능한 균형감을 갖추었다. 그는 철준의 굳세고도 다감한 성격을 섬세히 구현했다. 새로운 영역에 대해 어수룩한 모습도 보이는 철준은 다채로운 관계들을 맺고 끊으면서 관계의 형성에는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노래에 자신 없던 철준이 엔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큰 변화다. 철준의 노래가 기존의 영역에 없었던 새로운 영역들로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역동적으로 달려가는 자기 생을 북돋는 응원가로 들리기 때문이다.
영화 ‘3670’ 줄거리
김철준(조유현 배우)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교회 장학금으로 생활비를 해결하면서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97년생 탈북자이자 남성 동성애자다. 철준은 북한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씩씩하게 버티지만, 우연히 알게 된 남성 동성애 커뮤니티와 그 안에서의 새로운 만남에 대해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철준은 그 커뮤니티를 통해 퍽 친해진 또래 김영준(김현목 배우)과의 깊은 애증을 겪으면서 관계를 맺고 끊는 일의 기쁨과 아픔을 경험한다.
박준호 감독 소개
박준호는 단편 영화 ‘은서(2019)’에서 주인공 은서가 탈북자로서의 면 외에도 한 남자의 처, 한 딸의 어머니, 한 탈북자 어머니의 딸, 직장인 등의 많은 면모와 인간관계가 얽힌 입체적 개인임을 섬세히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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