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피곤한 여자를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거요? 우리는 반 시간만 이야기해도 스트레스 지수가 팍 올라가는데.”
그런 라라를 김은정 씨는 치욕에 치를 떨게 했던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라는 그녀와 가까이 지냈다. 김은정 씨는 라라가 자기에게 남들보다 따뜻한 애정과 인내를 갖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섣불리 라라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라라가 그런 김은정 씨에게 그래도 연민을 느낀 것은, 그녀에게도 남모르는 상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남자랑 잤는데, 그 사람이 깨어나더니 한다는 말이 술에 취해서 그랬다는 거야.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한참을 매달렸어. 가지 말라고. 그런데도 가더라.”
첫 정을 준 남자에게 받은 상처가 컸던 사람이었다. 그 트라우마가 커서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심지어 피곤하게 만드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있다. 외로움은 누구나 곁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어쨌든, 준호를 알아갈수록 라라는 하나씩 체념하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그것은 긍정의 적응이 아니었다. 그리고 부정적 적응은 무엇인가를 파괴하게 마련이다. 그 대상이 자신이거나 상대방이거나. 천성적으로 타인을 해치지 못하는 라라는 자신이 파괴되어 가는 걸,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내상은 깊어지고 있었다.
동거 초부터 시작된 싸움은 점점 독하고 악해져 갔다. 관계를 회복하기란 점점 어려워 보였다.
어느 날, 준호와 말다툼을 심하게 하고 마음을 풀기 위해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걷노라니 어두워서 불안한 데다 날이 추웠다. 갈 만한 마땅한 곳이 생각이 나지 않아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덧 근처 닥터 한의 집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닥터 한은 의사라서 기본 임상심리를 공부했기 때문에 이해심이 남다를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현명한 사람은 타인을 더 빨리 이해하게 마련이었다.
“저 사람과 같이 사는 게 왜 힘든가 설명하기가, 눈에 드러나는 나쁜 남편보다 몇십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에요. 어머나, 정말 행복한 부부네요. 다들 남편이 아내를 아주 예뻐한다고 부러워하고 있어요. 그렇게 상대방이 말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요.”
남들 보기에 행복한 아내였다는 것. 그것은 그녀의 연기력이 탁월한 탓도 아니었다. 그저 힘들고 고달픈 것을 내색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 오히려 진실을 알려야 할 순간에 몰이해를 초래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의 온화한 미소 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라라의 고민은 행복에 겨운 비명으로 들리곤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있는 거죠.”
닥터 한이 조용히 혼잣말하듯 말했다.
“과연 배고픈 돼지만 고통스러울까요. 배가 고파도 싫어하는 걸 계속 먹어야 하는 돼지의 고통은, 배고픈 돼지에게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복한 비명쯤으로 보일 수 있죠.”
배고파도 죽고, 배불러도 죽는다. 양쪽 다 고통스러운데 한쪽은 복에 겨운 비명으로 보인다는 것이 차이였다.
“자기가 진짜 먹고 싶고, 먹어야 할, 필요한 것은 먹지 못하고, 먹기 싫은 것은 억지로 강제로 먹어야 하는 것. 그것이 행복일까요. 게다가 그 고통이 남의 눈에는 행복인 것처럼 보이는 고통처럼 외롭고 고독한 것이 또 있을까요.”
닥터 한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 그것은 신의 가호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모스크바를 떠나야 했다. 그가 지인 의사에게 맡겨둔 병원이 재정적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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