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는 뱀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명확히 규정되기 어려운 어떤 두려움이 음침히 흐느적거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뱀처럼 불길한 기운이 그의 영화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 똬리를 스르륵 풀면, 일관된 음기가 우로보로스처럼 맺혔음을 확인하게 된다. 평범하(게 보이)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최면술사로 인해 살인마로 돌변하는 기현상을 다룬 ‘큐어(1997)’는 1995년 옴진리교 지하철역 사린 가스 테러와 밀접히 연관된 영화라는 점에서 일본의 사회와 시민들 속에 깃든 집단적 두려움과 분리될 수 없다. ‘회로(2001)’는 인터넷 사이트 소재를 활용해 일본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고독에 로그인시키는 수미쌍관 구조의 공포 영화였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기어온 사행(蛇行)을 이렇게 대략 따라가면, 일본 사회에 뱀독처럼 퍼진 충격과 두려움을 음귀로 둔갑시키는 귀기가 그의 영화에 비범하게 서렸음을 알 수 있다. 그 어두운 귀기가 일본의 사회와 관객이 앓았던 음험한 증상을 치유해 온 일종의 혈청일지도 모른다.
온갖 귀신으로 들끓는 그의 음계에서 ‘뱀의 길’은 사뭇 독특한 위상을 점한다. 약 30년의 세월을 타고넘어 한국에서 개봉된 이 영화에 귀신은 없다. 대신, 인간들만 얽히고설켜 있다. 영화는 인간이 귀신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처절히 느끼게 한다. 무참히 피살된 딸의 복수를 위해 진범을 찾는 미야시타 타츠오와 그의 복수를 돕는 척하나 거짓말로 조작과 배반을 몰래 도모하는 니지마 나오미는 인간의 잔악한 광기와 흉계를 날름날름 드러낸다. 납치와 공격을 당하는 인물들도 범죄 조직에 연관됨이 내비쳐진다.
거의 모든 인물이 인간의 허물을 걸친 독사인 듯한 이 지옥도가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지옥이 현실(의 부분)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의 공포(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홍지영 譯, 미디어버스, 2023, 19쪽)”가 일상에 잠재하는 것만큼 소스라치는 공포가 어디 있을까. “영화라는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그리기 위한 기술(같은 책, 21쪽)”이라는 감독 자신의 관점까지 헤아리면, ‘뱀의 길’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무서운 공포 영화로 자리할 법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험악한 음지가 재현된 범죄 스릴러로만 소비하면, 종합 예술로서의 변별적 성취는 제대로 짚지 못한다. 나오미의 사심(蛇心)에 조종되고 있는 흑막을 모르고 그에게 사심(謝心)을 느꼈던 타츠오가 몰락한다는 이야기는 평범할 수도 있다. 서사가 평범하다면, 문제는 형식이다. ‘뱀의 길’은 하얀 색채와 원환 운동에 연결된 수학 개념을 그 이야기에 휘감음으로써, 세계의 (무)질서를 간파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영화로 해석될 수 있다. 이 해석은 ‘뱀의 길’에 상당히 정교한 지성이 구축돼 있음을 포착하기에 유리하다.
나오미의 본업이 이공계 과목 강사임은 특기된다. 낮에는 범죄를 저지르고 밤에는 수식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은 거짓과 농락을 은밀히 일삼는 이중성과 겹친다. 그런 나오미가 흰 분필로 수식을 적으면서 말하는 쌍대성은 교묘한 포인트다. 쌍대성은 서로 달라 보였던 두 수학 체계에서 한 체계에 밀접히 대응하는 다른 체계의 관점으로 동일 원리를 기술할 수 있는 현상이다. 쌍대성은 상이한 것 같던 두 대상이 동일 구조를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는 통찰을 연다.
무질서한 파편들에서 기어코 질서를 만들려 하거나 유의미한 사건들을 만나고도 잘못된 연결 때문에 근원 질서를 못 찾는 인간의 폐허가 쌍대성을 증명하는 몸부림일 수 있다. 흰 외투와 검은 바지를 자주 입는 나오미가 몰래 사술을 부린다는 사실은 모르고 그를 믿는 타츠오의 무지도 쌍대성을 냉혹히 증명하는 듯하다. 둘이 처음 만난 곳도 나오미가 흰 분필로 길바닥에 수식들을 가득 적은 공원이었다.
둘이 처음 만났던 과거 시퀀스는 영화의 중간과 엔딩에 1번씩 나온다. 이 시퀀스가 중간에 나오는 때의 연출이 중요하다. 나오미가 권총 탄창을 엄지로 빙빙 돌리는 쇼트가 나오고, 곧 화면 전체가 하얘지면서 해당 시퀀스로 넘어가는 식으로 연출됐다. 엔딩에서도 화면 전체가 하얗게 변하면서 해당 시퀀스가 이어지는 연출이 쓰였다. 이 연출은 원환 운동이 (무)질서의 인식에 관한 철학과 영화의 구조에 대한 편집에 모두 연관됨을 보여준다.
‘뱀의 길’은 개인적 원한을 둘러싼 구체적 인물들의 의식적 범행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회적 사건을 빗댄 일반적 인물들의 무의식적 범행을 다룬 ‘큐어’와 변별된다. 한편, 과거에 이루어진 나오미의 의도적 계략으로 타츠오의 계획이 엇나가는 파국을 담은 ‘뱀의 길’과 달리, 구로사와 기요시의 이후 영화 ‘강령(2000)’은 영적 능력으로 유령을 볼 수 있는 여인마저 남편의 돌발행동으로 미래가 비의도적으로 틀어지는 파멸을 그렸다. 이렇게 ‘뱀의 길’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세계를 유의미한 수준으로 구부리는 지점에 똬리를 틀고 있다.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던 백사(百事)가 사실은 귀신(과 같은 누군가)의 조종으로 잘못 흘러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깨달음. ‘뱀의 길’은 그 깨달음에 빙의할 수 있게 하는 수작이다.
영화 ‘뱀의 길(1998)’ 줄거리 요약
미야시타 타츠오의 8세 딸 에미는 참혹히 훼손된 시체로 발견됐다. 딸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그는 학원강사 니지마 나오미와 함께 그 범인을 찾아 나간다. 타츠오와 나오미는 범죄 조직에 속한 두 남자를 차례로 납치해 그 둘을 폐건물의 벽에 쇠사슬로 속박하고 학대하면서 진범을 찾으려 한다. 은밀한 거짓말로 복수 계획을 어긋나게 하고 있던 나오미에게서 배반당한 타츠오는 납치됐던 자들처럼 똑같이 속박당한다. 수식들이 길에 흰색으로 가득 적힌 공원에서 타츠오가 나오미를 처음 만났었던 과거 장면이 뜨면서 영화는 끝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릿쿄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인간의 음울한 불안을 자극하는 공포 영화를 능란히 연출하는 귀재로 공인된다. 그의 영화 세계에서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비교적 밝은 정조로 다루어 희망적 지향을 띠는 영화 ‘도쿄 소나타(2008)’도 일본 내의 사회 혼란과 세대 갈등을 또렷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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