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간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자신을 리스티예프의 비서에게 부은행장이라고 밝힌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걱정하지 말고 식사나 하도록 하지요. 사과의 뜻으로 내가 저녁을 사지요.”
유명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너무 실망하고 낙담이 큰 나머지, 어찌해야 할 줄 몰라 고민하던 라라는 그냥 무심결에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참기 위한 제스처가 그렇게 수락의 표현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다시 전화했을 때, 무사히 약속을 잡을 수 있을지 불안이 여전히 남았다.
펠릭스라는 이름의 부은행장은 다시 그녀를 태우고 출발했다.
쿠투조프 대로에 있는 미국 피자 레스토랑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그가 말했다.
“맥도널드와 피자헛은 지금 모스크바의 최신 유행입니다. 심지어 100미터까지 줄을 서야 하는 일도 있어요. 맥도날드가 비교적 저렴해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장소라면, 피자헛은 좀 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지요.”
처음 보는 외국인 남자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는 사실이 마음 한켠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젯밤에도 격한 말다툼을 한 남편 준호에 대한 반감 때문에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자, 라라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직업적 일이야. 적응하고 적극적이어야 해. 어설프게 양심 찾느라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
가슴 명치에 걸려 있던 일말의 꺼림칙함이 가스 불에 캐러멜 녹듯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그리고 이미 그녀의 품에는 펠릭스가 도로변에서 꽃 파는 중년 여인으로부터 산 싱싱하고 굵은 커다란 붉은 장미꽃 다발이 안겨져 있었다. 사과의 뜻이라고 했다.
“모스크바에는 혼자 왔어요? 남편이 있나요?”
“아……”
“혼자인가요? 어디에 사나요?”
“기숙사에 삽니다.”
말하면서도 라라는 엉뚱한 사고를 저질렀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남편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저항감이 고개를 젓게 하고 말았던 거였다.
‘어찌 수습해야 하나.’
막막했다.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기 모습이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한 절규인지 그의 유혹에 넘어간 부끄러움의 몸짓인지 알 수 없었다.
‘될 대로 되라지.’
기숙사에 사는 것도 사실이었다. 크라프첸코 거리의 기숙사를 레닌 언덕의 본관 기숙사라고 둘러댄 것뿐이다. 혹시라도 그가 올까 걱정되어서였다.
펠릭스라는 남자는 황당한 제안까지 했다.
“아파트를 구해줄 테니 같이 살지 않겠어요?”
라라는 당혹해하며 거절했다.
“공부하는 동안은 기숙사가 좋아요. 외국인에게는 정보를 얻기 쉬운 곳이라서요.”
블라디미르 리스티예프와의 인터뷰는 끝내 다시 성사되지 않았다.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실수였다.
기회를 잃은 그와의 만남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리스티예프가 암살되었다. 정치적 암살이라는 것만 항간에 회자되었다. 그뿐이었다. 러시아 국영방송사 사장이자 앵커였던 그의 죽음의 이유와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 그를 인터뷰했더라면 그 암살의 원인이 될 만한 단서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두고두고 라라는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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