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려 있는 북경 천안문
필자가 중국에 있을 때, 그들의 대륙문화 가운데 부러워한 일면 중 하나가 바로 관용문화였다.
일례로 신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평가할 적에, 흔히 ‘7할의 공로, 3할의 과실(七分功勞, 三分過失)’라는 표현을 쓴다.
▲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의 마오쩌둥
인간은 누구라도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원칙 아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계승하고, 부정적인 과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적시함으로써 후세에 교훈으로 삼는다는 정신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따라서 국력을 소모해 가면서까지, 특정 역사 인물에 대한 논쟁을 끝없이 일삼는 우리 실정에서 볼 때, 부러운 측면이 아닐 수 없는 부분이다.
교수, 대학생에서 일반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이라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天下没有完美的)’ 라는 말이었다.
인간이든 제도든 그 무엇이라도 세상에 완벽한 게 없다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초등학생들도 일상생활 가운데 늘상 입에 올리는 관용구였다.
▲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투가 한창일 때 공산당 본부 사무실에서 집무 중인 마오쩌둥(1948년)
▲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리틀 레드북’을 펼쳐 읽고 있는 여학생들(1968년)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도, 사람의 일차적인 실수에 대해서는 책임은 지우지만, 매도까지는 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누구라도 실수는 저지를 수 있다는 인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로 모면하려 들 때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거짓말로 무마한다는 건, 곧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남을 속이는 위선적인 행위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용서해 줄 여지조차 없는 만큼, 가차 없는 처벌을 받게 된다.
반면 우리나라의 실정을 보면 어떠한가. 당선과 동시에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만, 임기말에는 누구라도 예외 없이 시정잡배보다 못한 위치로 급전직하하지 않는가. 헌정 이래 이러한 악순환은 현재까지 되풀이되고 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왜 그럴까?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공직자를 비롯한 지도자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한 쪽으로 쉽게 몰리는 국민성 때문일까.
그런 잣대로 볼 적에, 우리는 존경할 만한 위인을 두지 못한 불행한 나라에 속한다.
일제시대에는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몇 사람 외에는 크고 작은 흠결 때문에, 그들의 업적에 비해 인색한 평가를 받거나 심지어는 매도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겠다.
왜 우리는 존경할 만한 대통령을 두지 못하는 걸까. 왜 매번 실패하면서도 명망가를 찾는가. 국정 경험도 없는 명망가가 우리의 사회 모순을 한꺼번에 해소해 주리라는 기대를 거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도 건국의 위업이라는 긍정적인 부분을 일정하게 인정해 주고, 독재라는 부분은 과실이었다고 구분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안되는 것일까.
요즈음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소모적인 논쟁을 접할 때마다,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비단 필자 한 사람에 국한된 현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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