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소통문화아카데미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스카이데일리
다름을 만날 수 없는 곳에서는 같음만이, 같음의 연장(延長)만이 있을 뿐이다. 다름 만남 여행은, 우리들의 생각을 열어준다. 일상세계와 많이 다른 것들을 많이 만난 후,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경험에서 그리하여 세상과 사람을 보는 방식, 묻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에서, 그리고 느끼는 방식에서 많이 달라져 있게 된다. 여행으로 나는 많이 ‘남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 많이 자라고 달라져서 집에 돌아왔다. 그렇지만, 집에 머물고 안주(安住)하면서 같음에 다시 붙들리게 된다면, ‘도루-아미타불’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 정체(停滯)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나를 떠나려 하고 남을 만나려 할 때, 나의 같음, 나의 정체성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일정한 방식으로 같음을 유지하면서 쉬지 않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름을 만나고 경청하고 인정하는 일이, 나를 버리고 남의 다름에 조건 없이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를 인정함은, 자신의 정체와 같음에 기초하되, 상대로 ‘그냥’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열려서 상대와 함께 생각을 나누면서, 객관적인 사실과 진리를 찾으려는 자세라 할 것이다.
‘남-화’도 ‘나-화’도 모두 일방이다. 함께 아닌 함께다. 상대를 경청함이 사실과 진리를 위해 서로를 돕고 키우는 자세이지, 상대를 무조건 받아들임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에 붙들리기 쉬운지라, 치우쳐 있는 자신을 열고 이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에서 상대를 인정하라고 강조하는 것뿐이리라.
경청(傾聽)은 상대의 입에 내 귀를 기울여 상대의 메시지를 보다 정확히 받아내어 이해하려는 자세다. 경청하다는 독일어로는 zu-horen(쭈-회렌)이다. zu(쭈)는 ‘~로’, ‘~을 향하여’(傾)의 뜻이 있으며, horen(회렌)은 ‘듣다’(聽)의 뜻을 가진다.
상대가 보내려는 메시지를 정확히 알아야, 나는 받아들이면서든 거부하면서든, 이를 존중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지레짐작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지레짐작 속에 소통은 자주 허우적거린다. 아니, 소통하는 우리들이 허우적거린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상대의 다른 시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상하의 힘 논리가 개입하여, 일방과 억지로 상대의 말을 억지하는 근거로 되면, 문제가 생긴다. 경청에서 받아들이고 말고는, 내 의지에, 내 위치에, 내 나이에 혹은 내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상대의 주장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서로를 열 때, 서로를 향할 수 있고 만날 수 있으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서로의 생각크기를 키울 수 있다. 나에게 붙들려, 나에게로 상대를 들이지도, 내가 상대에게로 다가설 수도 없게 되는 것이 문제다.
열어야 소통이 되고, 소통이 되어야 함께할 수 있다. 삶은 함께다. 우리의 주제는 나와 남, 같음과 다름이 만나고 소통하는 함께의 모습이다. 사실, 만남은 나로부터 반대편에 있는 상대를 향해, 상대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반대방향이 같은 방향’이라 한다면, 이는 사람들이 서로의 반대방향으로 향해 나설 때, 만남과 함께가 가능하고, 만남과 함께의 크기 키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거리 속에 만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같은 방향을, 더구나 같은 속도로 간다면, 이들은 끝내 만나지 못할 것이다. 떠날 때 만날 수 있듯이, 다를 때 같을 수 있음이런가!
다름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크기, 같음의 크기를 키운다. 반대로, 우리의 같음 추구가 남들의 다름 추구를 촉진할 수 있다. 다름이 같음의 크기를 키우고, 같음이 다름의 크기를 키운다면, 그 이유는 같음도 다른 쪽에서 보면, 하나의 다름이기 때문이다. 내가 남에게는 남이기에, 남들은 나를 다름으로 하여, 자신들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3자의 눈으로 보면, 그 같음과 다름은 두 다름들 혹은 두 같음들일 뿐이므로, 나와 너의 만남은, 결국 한 다름이 또 하나의 다름과 혹은 한 같음이 또 하나의 같음과 만나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 할 때, 이는 우리가 우리를 우리(柵)로 하여 우리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우리적인 것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말한다. 남들에 의해서 살려지는 우리이기도 하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살리기도 하지만, 이럴 때, 우리는 남들에게 최대한 ‘좋은 다름’을 제공할 수 있다.
다름에 열고 다름을 만나고 인정하려는 일은, 결국, ‘함께의 크기’를 키우는 일로 이어진다. 또, ‘함께의 크기’를 키우는 일은 결국 그 속의 개인들의 삶의 크기, 사람크기를 키우는 중요한 전제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같음의 크기를 키우는 다름’과 ‘다름의 크기를 키우는 같음’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의 크기’는 ‘홀로의 크기’ 키움의 계기이고, 홀로의 크기는 함께의 크기 키움의 계기일 수 있다.
사회 없는 개인도 개인 없는 사회도 우스운 일이다. 다름이 보장되는 같음, 다를 수 있는 같음, 살아있는 같음, 개성 있는 같음, 여럿이 있는 같음, 여럿의 활발 속에 편안한 같음, 여럿을 위한 같음이 ‘수평적 같음’이요, 수평적 다름을 요청하고 전제하고, 나아가, 결과하는 같음이라 할 수 있다.
같음 앞에 붙는 이런 수식어들을 위해, 우리는 어렵게 여행하면서 다름을 만나고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이에 반해, ‘수직적 같음’은 다름을 배제하는 같음, 정체된 같음, 획일적이고 불편한 같음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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