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뀔 즈음이면 사람들은 변화를 꿈꾼다. 바다 속 연어들이 회귀의 지느러미를 높이 세우듯이 새로운 햇빛이 깃드는 곳으로 이동하고 싶다 생각한다. 당신이 지나온 한 해를 되돌아보는 이유도 그런 기대 때문이다. 어쩐지 내년에는 잘될 것 같다. 단순히 해가 바뀐 때문만은 아니다.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 구태의연한 내면의 정신을 비워야 한다는 자기 의무감 따위가 교차하면서 샘솟는 감정이다. 당연하다.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새로운 날이 아니다. 꿈꾸는 당신은 아름답다.
변하기 위해서 당신이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비우는 일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의 일이다 보니 막연하다. 무엇을 비우는 건가. 여기, 당신에게 맞춤한 사례가 있다. 당신이 이사하던 날 이삿짐 앞에 서서 탄식을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탄식은 이삿짐 쌀 때보다 짐을 풀었을 때 더 깊고 길다. 끝없이 이어지는 쓰레기 물건들. 그 동안 버려도 다섯 번은 버렸다고 생각한 20년 전 수첩 뭉치·신혼 초에 입었던 양복 더미·쿰쿰한 내음이 짙게 배인 개량 한복·책장에 꽂혀 있었는지 누워 있었는지조차 모를 책 뭉치들·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손톱깎이 열 댓개…. 이것 하나하나가 바로 마음의 쓰레기들이다.
한때는 하나같이 손끝으로 매만지며 좋아했던 물건들이다. 지난 1월, 한 해를 시작할 때는 새로 사 입은 양복을 걸친 몸처럼 상큼했었다. 하지만 이제 낡은 꿈을 버리고 새로운 꿈을 꾸는 시간이다. 지난 시간 쌓고 쟁여 놓은 것들을 버리고 비우고 가볍게 하기 좋은 시간에 당도한 셈이다. 이제야말로 나도 모르게 움켜쥐고 붙들었던 것들을 털어 낼 기회다. 하지만 버리고 비우는 연습과 훈련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마음의 일이어서 더욱 그렇다. 차라리 이삿짐 쓰레기라면 눈으로 직접 보면서 버리기라도 하지.
그러므로 냉정한 자문자답이 필요하다. 스스로 애착하여 마음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의 밀착도는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당신과 당신이 버려야 할 애착의 대상의 사이는 살가죽과 근육의 관계와 같다. 구분하기도 어렵고 분리하기도 어렵다. 분리를 강요하는 건 젖먹이 어린 아이와 엄마의 관계를 떼어놓는 일처럼 매정하다. 그러므로 애착이나 집착은 본인 아니면 해결할 사람이 없다. 애착의 대상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이 ‘가문의 원수’가 되는 이치를 보면 안다. 스스로 끊어 내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해답이다.
온 집안에 부려 놓은 이삿짐은 애착과 집착으로 점철된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시각화해 준다. 언제 사 두었는지 모를 물건들, 버려야지 하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물건들, 이건 동생 주고 저건 시누집 갖다 줄거야 하면서 5년을 흘려보냈던 물건들…. 그런 것이다. 저 물건들을 모두 ‘내 것’이라면서 부여안고 살았다.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끌어안고 있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온갖 기억이나 생각들, 5년 전에 사다가 냉장고 안쪽에 처박아둔 곰배젓갈통 같은 생각이나 기억들이 있다. 그런 마음을 알아내는 방법이 있다. 자기 질문이다. 자기 질문은 당신이 낯설어 하는 일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법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물어보듯 자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올 한 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나를 순식간에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 말은?’ ‘철수한테서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은 말은 뭐지?’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금방 병이 들게 될 거야.’ ‘내가 절대 버릴 수 없는 3가지만 적으라면 뭘까?’ ‘나를 날마다 살아가게 하는 다섯 사람만 적으라면 누굴까?’
변화하려는 의지가 새로운 날을 만든다. 해가 바뀐다 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새로운 날을 얻기 위한 방법이 자기 질문이다. 자기 질문은 나의 생각과 신념·관념 따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객관화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다. 나를 제3자처럼 보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냉정함과 객관성을 순식간에 확보한다.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기.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노트를 꺼내 놓고 자문자답해 보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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