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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35] 기억조차 용서할 수 없는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30 06:30:35
 
 
 
돌아온 희숙이 담배 냄새를 풍기며 철퍼덕 앉았다. “선배, 나간 사이 전화 왔어요. 변태 새끼한테서.” 희숙과 승연은 3초쯤 서로 말없이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허탈하고 공허했지만 한편으론 얄미운 놈 뒤통수 한 대 갈긴 것처럼 시원했다. 희숙이 설명한 적 없었고 승연도 들은 바 없었지만 그랬다. 변태 새끼는 그렇게 웃음거리가 되었고 희숙의 갈증은 잠깐이나마 해갈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승연아,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신 거야?” 희숙이 웃음을 멈추고 물었던 첫 번째 질문이었다. 분신자살하겠다고 협박하던 사람 실수로. 말을 흐리자 희숙은 혹시 정일어패럴 사건이냐 물었다. 승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숙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최대한 크게 떴다. “세상에… 그 얘기 들었을 때 난 왜 승연이 아버지란 생각을 전혀 못 했을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듯 희숙이 중얼거렸다. 승연은 일련의 사태를 빠른 속도로 털어놓았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기억은 여전히 가까이 있었다. 아니 꺼낼수록 생생했다.
 
승연은 아버지와 화해할 시간을 갖지 못했노라, 아버지 말을 듣지 않았던 시간을 후회한다며 그게 평생 가슴에 한이 되었다고 말했다. “잊으려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희숙은 자신의 가늘고 마른 손으로 승연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근데 그건 사고였잖아. 네 잘못이 아닌걸.” 승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제 잘못이에요. 제가 해방하려던 노동자와 시비에 말려 아버지가 죽임당한 거예요. 내 잘못 아니라고 설득하려고도 말고 어설프게 위로할 생각일랑 마세요. 전 기억조차 용서할 수 없어요.” 희숙은 승연의 잡은 손을 슬쩍 내려놓았다. 노동운동이든 민주화 운동이든 모두 한 패거리라는 승연의 원망이 전기에 감전되듯 와닿았다.
 
희숙은 오정일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오정일이 희생당한 건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을 사주하는 세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희숙도 비슷한 훈련을 했고 그 자신이 될 수도, 한솥밥 먹던 동지들이 될 수도 있었다. 지령이 내려오면 과제를 이수하는 것 말고 해방은 요원했으니까.
 
승연의 아버지가 당한 사고도 태주의 사고도 모두 우연이 아닐 것이다. 희숙은 승연이 그렇게 믿는 걸 위로할 마음이 없었다. 뒤늦게 후회한다 해도 바뀔 운명은 아니었겠으나 후회는 조금씩 과거의 어리석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 후회밖에 없다는 게 초라했지만.
 
희숙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폐 깊은 곳까지 헤집고 나온 연기는 해를 가린 먹구름보다 색이 진했다. 허공으로 퍼졌던 연기 사이로 표범 한 마리가 도심 속 건물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표범은 먹이를 찾듯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빨간 석양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던 표범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쳐다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희숙의 휴대폰에서 진동벨이 울렸다. 표범이 석양 속으로 사라졌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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