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는 미라보의 뛰어난 웅변 능력을 높이 사 그를 가장 소중한 협력자 겸 개인 고문으로 삼았다. 미라보는 왕과 함께 군주제를 설교하고, 백성과 함께 혁명을 위해 싸우는 이중 역할을 수행했다.
1789년 7월 중순 미라보는 바스티유를 방문했고, 열광하는 군중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대중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미라보는 정치 개혁이 공공 폭력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미라보는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기 위해 맹렬히 활동했다. 그는 의회와 루이 16세를 화해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라파예트 후작이나 자크 네케르와 같은 인기 인물과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미라보는 잠시 제헌의회 의장을 지냈으나 1790년 말에 왕궁의 신임을 잃었다. 1791년 1월 그는 이해관계를 둘러싼 완고한 왕족과 의회 간의 경쟁이 입헌군주제를 거의 불가능한 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강이 악화되자 미라보는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의 시골집을 임대해 그곳에서 주말 휴식을 취했다. 그해 3월 26일 파리로 돌아온 그는 다시 대중 앞에 서서 연설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연설이었다.
시골집으로 다시 떠난 그는 일요일과 월요일의 일부를 그곳에서 보냈지만 고통이 더욱 심해지자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주치의이자 친구인 카바니스는 미라보의 병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잠시 호전되는 가 싶더니 다시 악화됐고 미라보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약한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죽음에 직면했다.
4월 1일에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그의 조카를 상속자로, 라마르크(La Marck) 백작을 집행자로 임명했다. 같은 날 8년 동안 소원하게 지냈던 탈레랑을 응접했다. 미라보는 그에게 그 동안 계속해서 준비해 온 연설문 원고를 건넸다. 4월 2일 토요일, 날이 밝자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한 그는 면도를 하면서 “친구여, 나는 오늘 죽겠지. 거기서는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않는 이 잠에 즐겁게 빠져들기 위해 향수를 뿌리고, 꽃으로 관을 씌우고, 음악으로 우리 주위를 둘러싸는 일만 남았다네”라고 카바니스에게 말했다.
그는 친구 프로쇼(Frochot)에게 자기 하인들을 부탁하고 8시 반에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짧은 생애였지만 국민과 국가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한 그였다. 미라보의 사망 소식은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4월 2일 탈레랑은 대가가 남긴 연설을 의회에서 낭독했다. 4월 3일 독살설이 돌아 그의 시신을 해부했지만 결과는 음성으로 판명됐다.
4월 4일 의회는 고인에게 볼테르와 루소처럼 팡테옹의 영예를 수여했고, 저녁 5시에 장례 행렬이 파리 쇼세-당탱 거리에 있는 집을 떠나 생-외스타슈(Saint-Eustache) 교회로 갔다. 그에게 마지막 헌사가 봉헌됐다. 그의 시신은 곧 팡테옹으로 향했고, 자정이 돼 도착했다. 관은 데카르트 근처에 놓였다. 파리는 애도에 빠졌고 극장은 문을 닫았다. 4월 5일, 파리시는 총회에서 쇼세-당탱 거리에 미라보(Mirabeau)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4월 16일, 샹젤리제 거리의 이탈리아 극장(Théâtre-Italien)에서는 ‘미라보’라는 제목의 연극이 공연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미라보의 영웅 대접은 곧 끝이 났다. 1792년 말 튈르리 궁전에서 루이 16세의 비밀 금고가 열리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금고에서 발견된 서신에는 미라보가 왕에게 조언을 제공한 대가로 매달 6000리브르씩을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이로 인해 미라보에 대한 대중의 존경은 무너졌고 법령에 따라 그는 국가의 반역자로 선언됐다.
1793년 11월 27일 프랑스 의회는 그의 시신을 팡테옹에서 제거하고 그 자리에 마라(Marat)의 시신을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팡테옹에서 가져온 그의 재는 바람 속에 던져졌고, 그를 우상으로 여겼던 사람들은 파리 그레브 광장에서 그의 흉상을 불태웠다. 1794년 9월 12일 그의 뼈가 납관에 담겨 생테티엔뒤몽 묘지로 옮겨졌고 4년 뒤 그의 여동생은 오빠의 시신을 클라마르(Clamart) 묘지로 옮겨 익명으로 유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후세는 그에 대해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숨을 거뒀던 자택이 있던 쇼세당탱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미라보거리로 명명되었다. 1881년 12월 13일 법령에 따라 그의 탄생지 비뇽은 비뇽-미라보로 부르도록 승인됐다.
비뇽 마을은 루아레 지방에 있는 중세 시대 작은 요새로 수많은 영주가 거주한 곳이다. 미라보의 아버지는 1740년 친구의 조언에 따라 이곳에 저택을 구입해 성으로 이용했다. 이 성에서 1749년 3월 9일 태어난 미라보는 8세까지 여기서 살았다.
미라보가 죽자 이 마을 사람들은 비뇽 이름에 미라보를 추가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의 위인 중 첫 번째 시민인 미라보를 기리기 위해 이 본당에 비뇽-미라보라는 이름을 붙여 프랑스의 모든 시민이 미라보의 출생지와 그가 프랑스 태생임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소원이 성취되는 데는 약 한 세기가 걸렸다. 비뇽 마을이 비뇽-미라보 마을로 바뀌면서 미라보가 태어난 곳도 비뇽-미라보성이 됐다.
멋진 공원 한가운데 자리 잡은 비뇽-미라보 성에는 오늘날 ‘식물의 시학’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정원이 가꾸어져 있다. 성의 일부에는 독특한 다색 석판 컬렉션이 전시돼 있어 이 또한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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