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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감독원은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보이스피싱 수법을 공개하며 “반드시 속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으로 합성한 가짜 이재명 대통령이 투자상품 광고에 등장해 투자를 권유한 사례까지 발생했다. 이 같은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댓글에는 “왜 속느냐”는 반응이 잇따른다.
기자의 입장에선 보이스피싱 사례를 흥미 위주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사건의 황당함이 부각돼 독자 입장에서는 ‘어째서 이런 일에 속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쉽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실제 내용은 다르다. 허무맹랑한 거짓말 뒤에는 피해자를 설득하고 신뢰를 쌓기 위한 치밀한 과정이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짜 교수’의 경우, 투자 사기에 악용되기까지 오랜 시간 신뢰를 구축하는 절차가 뒤따른다. 범죄 조직은 가짜 홈페이지를 개설해 강의를 진행하고, 출석체크와 보상 제도를 운영하며 피해자의 경계를 허문다. 텔레그램 ‘투자방’ 초대나 낯선 외국인의 메시지처럼 흔히 접하는 유혹은 그저 ‘가장 취약한 대상’을 노린 미끼에 불과하다.
친분을 악용하거나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미리 파악한 뒤 접근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검찰·경찰·금융감독원을 사칭해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다”고 협박하는 전형적인 수법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권위에 대한 두려움’과 ‘재산 손실의 공포’를 동시에 이용하는 방식이다. 피해자는 20대 청년층부터 30대 직장인, 고학력자, 전문직 종사자까지 폭넓다.
범죄자들은 사회적 이슈에도 빠르게 반응한다. SK텔레콤 해킹 사건이 발생하자 ‘유심 교환’을 명목으로 접근했고, 정부가 민생 회복 쿠폰을 배포하자 ‘소비쿠폰 스미싱 문자’가 등장했다. 피해자가 경찰서나 금융기관에 확인 전화를 걸어도 안심할 수 없다. 피싱범의 말에 속아 악성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했다면 피싱범이 통화를 가로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시도 자체가 더 깊은 함정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일상적인 거래에서도 범죄에 연루될 수 있다. 한 30대는 해외여행 후 남은 외화를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판매하려다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의심받았다. 또 다른 피해자의 돈이 ‘외화 거래대금’ 명목으로 그의 계좌로 입금된 탓이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이런 경우 계좌가 2~3개월간 동결되고, 다른 계좌도 함께 제한된다”며 “본인이 피해자임을 입증하기조차 쉽지 않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보이스피싱 수법은 날로 교묘해지고 있다. 가짜 공문서, 자격증, 애플리케이션, 강의, 교수에 이어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한 합성 인물이 허위 상품을 광고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 청년층은 비교적 기술을 따라잡고 있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언제든 속수무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인공지능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기보다는 단순히 ‘편리한 도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술 격차가 커질수록 첨단 기술을 활용한 보이스피싱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속지 않는 법’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속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경계심이다. 낯선 전화를 받았다면 일단 통화를 끊고, 가족이나 지인에게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금융감독원(1332), 경찰(112), 검찰 등 공식 기관을 통해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절차가 필수적이다. 금융사 직원을 사칭한 경우에는 해당 은행 고객센터에 직접 문의해야 한다. 휴대전화에 악성 앱이 설치된 경우 통화가 가로채질 수 있으므로 가능하다면 다른 기기를 이용해 연락하는 것이 안전하다.
최근 금융감독원과 주요 시중은행은 고령층을 중심으로 보이스피싱 방지 캠페인을 확대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자녀에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가르치던 세대가, 이제는 “낯선 전화를 받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 시대가 됐다. 기술이 더 발전하면 20년 후에는 지금의 청년층이 그 교육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크다.
기자가 예순 살이 넘은 할머니 댁을 방문했을 때, 기자는 할머니의 부르튼 손을 보고 연고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 할머니는 매니큐어를 준비해 갈라져 상처가 생긴 곳에 덧발랐다. 할머니는 “매니큐어를 바르면 시원하고 매끈해져서 좋다”고 설명했다. 매니큐어를 접할 기회가 잘 없었던 탓에 엉뚱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식의 기준은 세대마다 다르다. 언젠가 우리도 ‘상식에서 뒤처지는 세대’가 될 수 있다.
보이스피싱은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춰 진화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범죄자들은 이를 누구보다 먼저 범죄 수단으로 활용한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우리의 상식이 부족한가’가 아니라, 빠르게 의심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방법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경고의 대상이 아니라고 안심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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