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부 김일성주체사상 비판
한마디로 말해서 김일성주체사상은 젊은이들에게는 설득력이 강한 이론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사상이 인간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어서 인도주의 또는 인간주의의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엄밀히 검토해 볼 때 거의 전부가 거짓과 위장과 애매성과 자가당착·비약과 억지와 개념의 책략 그리고 표절 등의 합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에 그 주요한 점들에 관해서 비판하기로 한다. 먼저 소위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라고 하는 사람중심론을 다루기로 한다(‘철학적 원리’는 이하 ‘사람중심론’으로 부르기로 함). 이 사람중심론이 거짓이거나 위장일 때는 다른 이론, 즉 ‘사회역사 원리’ ‘지도 원칙’ ‘역사적 의의’ 등도 거짓이거나 억지 주장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사람중심론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서 그것이 자연과학적 사실 및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고 인류의 통념과도 어긋나는, 전적으로 허구와 위장 이론체계임을 폭로하기로 한다.1)
1. 철학적 원리(사람중심론)의 비판
(1) 인간관의 요점과 비판
먼저 주체사상의 인간관의 요점을 간단히 소개한다.
우선 김일성주체사상에 의하면 ‘주체사상은 사람 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9쪽)이라고 자찬하면서 인간관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1) 인간관의 요점 소개
주체사상은 사람과 사람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첫째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9쪽)
둘째 “사람은 물질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9쪽)
셋째 “사람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서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의 사회적 속성을 지닌다.”(10쪽)
넷째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에게만 고유하다.”(10쪽)
다섯째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10쪽)
그러면 이제부터 이러한 개념 또는 문제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기로 한다.
2)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의 비판
우선 ‘사람’의 개념이 심히도 애매하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주체사상이 사람중심론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을 명백히 하고, 논리를 전개해야 함에도 그 개념이 애매하다. ‘사람(인간)이 자연적 인간인가 계급적 인간인가’를 주체사상은 먼저 밝혀 놓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역사원리에 적용될 때는 분명히 계급적 인간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주체사상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사람’이 자연적 인간이라고 하면 그것을 역사에 적용할 때는, 역사는 계급적 개념을 지니지 않은 단순한 ‘인류’의 역사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처음에는 ‘물질적 발전의 특출한 존재’(9쪽), ‘자연계에서 벗어난 특출한 존재가 인간’(9쪽)이라고 하면서 분명히 인간을 자연적 인간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역사 발전을 설명할 때는 이렇다 할 논리적 근거도 없이 계급성을 부여하여 계급적 인간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논리의 비약인 것이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청년 시절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 경도되어 그의 자연적 인간관, 즉 ‘자연주의적 인간주의’를 받아들인 바 있었다. 포이어바흐의 이론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질은 이성·사랑(심정)·의지 등이었는데 나중에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현실적인 역사적인 인간’으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인간관을 포기했다. 착취와 억압하에서 신음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키려는 계급투쟁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투쟁에는 계급적 인간관만이 필요했으며, 자연적 인간관은 도리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솔직하고 분명했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그 점이 불분명하며, 뿐만 아니라 역사 원리로 보아서 사람의 사회적 속성인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이 모두 계급투쟁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사람’이 처음부터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계급적 인간이었음을 의심케 한다. 만일에 처음부터 계급적 인간인 것을 자연적 인간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꾸몄다면 이 ‘사람’의 개념은 거짓이요 위장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주인’에 관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여기서 ‘주인’은 일반적으로는 ‘자주적 인간’을 뜻할 때도 있으나 대개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물건의 소유주’ ‘주종 관계에 있어서의 주인’ ‘대상에 대한 주체’ ‘추종자에 대한 지도자’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자’ 등 여러 가지 상대적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사람중심론에서의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할 때의 주인은 어떤 뜻의 주인인가?
주체사상에는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10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주인’도 뜻이 애매하다. 세계의 주인은 세계를 지배한다는 뜻의 주인 같기도 하며, 운명의 주인인 경우에는 ‘자주적 인간’으로서 주인 같기도 하다. 또 ‘자연은 인간 노동의 대상이다’(12쪽)는 말도 있는데, 주인은 이 경우에는 노동의 ‘주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주체사상에는 자연(세계)을 개조하고 사회를 변혁하고 새것을 창조하는 것이 사람의 역할이라고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인’의 개념이 아니라 표현 그대로 인간의 역할일 따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인’의 뜻이 애매하기 때문에 이런 애매한 뜻의 ‘주인’으로부터 인민대중의 계급투쟁 이론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순전히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예컨대 ‘주인’을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때 주체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대상을 지배하는 입장’을 뜻하고, 대상은 주체의 지배와 지도를 받는 입장을 뜻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체의 개념으로는 계급투쟁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주체사상은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을 역사에 적용하여 ‘인민대중이 주체’라는 개념을 세워서 계급투쟁을 이끌어 내고 있는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체’는 이 경우 대상에 대한 ‘주체’이기 때문이며, 주체는 대상을 지배 또는 지도하고 대상은 주체의 지배 또는 지도를 순순히 받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마치 북한에서 당과 인민의 관계와 같다. 당은 인민을 지도하고 인민은 당의 지도에 순종한다. 이것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역사 발전에 있어서 인민대중이 주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 주체를 따라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이 주체로서 착취계급인 지배계급과 투쟁한다고 말하지만, 이때의 지배계급은 인민대중의 적대자일 뿐이지 인민대중의 대상이 결코 아닌 것이다. 차라리 주체와 주체끼리의 싸움이라면 말이 된다. 인민대중에도 주체와 대상이 있고, 지배계급에도 주체와 대상이 있는 상황에서 인민대중의 주체(지도자)와 지배계급의 주체가 서로 싸운다면 말이 된다. 그것이 자연법칙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리학에서 양전기(주체)와 음전기(대상) 사이에는 결합이 이루어지고, 양전기(주체)와 양전기(주체) 사이에는 반발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계급 간에 있어서도 주체와 주체의 사이에는 투쟁이 벌어질 수 있어도, 주체와 대상의 사이에는 투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은 자연법칙과도 일치되는 이치인 것이다.
이리하여 ‘주인’을 ‘대상에 대한 주체’라고 해석한다면, 계급투쟁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 다른 뜻, 즉 ‘주종 관계에 있어서의 주인’ ‘추종자에 대한 지도자’ 등의 뜻으로 해석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계급투쟁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민대중이 주체가 되어서 혁명투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볼 때 억지 주장인 것이다.
차라리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경우처럼 ‘유물변증법’의 모순의 이론을 출발점으로 해서 계급투쟁론을 이끌어 냈다면 논리상의 하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체사상이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인간중심론을 시발점으로 했기 때문에, 상기한 바와 같이 계급투쟁론은 억지 주장이 되고 만 것이다.
창조를 개조의 뜻으로 규정… 정복‧투쟁 합리화 속셈
창조성을 인간 고유 속성으로 왜곡… 다른 동물도 창조 능력은 타고나
목적 의식을 세계 개조 수단으로 이용… 투쟁‧혁명 정당화 시키기 급급
3) ‘사람은 물질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의 비판
여기서 사람이 사회적 존재라는 말을 비판한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나 그 외의 공산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물리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 즉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 존재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점을 특히 강조하여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10쪽)고 주장한다.
이것은 세계(자연계)의 다른 존재들은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생물계, 특히 동물계에는 계급투쟁이 없으나 인간사회에 계급투쟁이 있는 것은 인간이 이와 같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유일한 사회적 존재’라는 주장은 주체사상의 전형적인 허언의 또 하나의 사례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외에도 자연계에는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는 예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생물학에는 ‘군거’니 ‘군생’이니 ‘집단’이니 하는 용어가 있다. “같은 종류의 생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는 일”에 붙여진 낱말이다. 그중 어떤 생물 집단은 개체 간에 긴밀한 조직체계를 형성하여 상호 협조함은 물론 리더(보스)를 중심으로 한 질서가 세워지고 분업까지 지켜지고 있는 훌륭한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는 예도 있다. 그 좋은 예가 개미와 벌의 사회이다. 즉 개미나 벌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는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만이 사회적 존재라고 우겨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소위 ‘건설’과 ‘계급투쟁’ ‘혁명투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면 그 합리화의 속셈은 무엇인가? 그것은 투쟁을 의무화시켜서 북한 동포에게는 강제 노동을 강요하고 남한 내의 학생과 노동자에게는, 이들을 선동하여 대한민국을 타도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4)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의 비판
주체사상은 여러 곳에서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이 사람의 본질적 특성인 동시에 사람의 사회적 속성임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속성은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람의 속성(10쪽)이기도 하며, 또 인간에만 고유한 속성(10쪽)이라고도 한다. 다음은 이에 대해서 비판하기로 한다.
① ‘자주성’의 비판
주체사상에 의하면 ‘자주성’은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10쪽)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세계의 주인’이란 ‘자연의 구속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하여 복무하도록 만드는 것’(10쪽)을 말한다. 자연의 구속을 극복한다는 말은, 자연에 힘을 가하여 불리한 조건을 제거하고 유리한 여건 또는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서, 태고시대의 어로 수렵으로부터 중세의 농업, 현대의 공업 등의 산업 등이 모두 자연 구속의 극복 개념에 포함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극복은 ‘모든 것(환경)’을 자신을 위하여 복무하도록(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주성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자연의 구속을 극복할 능력’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동물의 생활과 인간의 생활은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차원이 달라졌다. 그러나 유물론적 인간관으로 볼 때 태고시대에는 인간이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거나 강이나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던 때와, 또는 산에서 짐승을 잡아먹고 살던 때가 있었다.
또 인간이 자연동굴 속에서 또는 동굴을 파 가지고 그곳에서 살던 시대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동물인 까치는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산다. 또 흰곰은 물고기나 물개를 잡아먹으며 동굴에서 산다. 범이나 사자는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다. 태고시대의 인간의 수상생활·동굴생활·고기잡이·사냥 등은 근본적으로 동물의 생활 방식과 다를 바 없었다.
즉 태고시대의 인간의 생활은 동물의 생활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위에서 주체사상은 자주성을 포함한 인간의 사회적 속성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만 고유하다고 했다. 따라서 그 본질적 특성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 시대가 바뀐다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태고시대의 이와 같은 생활양식은 그대로가 ‘자연 구속에 대한 극복’의 방식인 동시에 동물적 생활방식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의미의 ‘자주성’은 동물에게도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음은 자주성의 뜻에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을 또 비판하기로 한다. 주체사상은 ‘운명’의 개념을 명확히 밝혀 놓고 있지 않으며, 아마도 상식적인 판단에 맡기고 있는 것 같다. 보통 상식으로는 ‘운명’이란 앞으로 다가오는 길흉화복을 말하는 것이고, ‘운명의 주인’이란 ‘흉과 화를 피하고 길과 복을 가져오게 하는 데 있어서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써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힘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있다. 우리는 인간사회나 동물세계에 생존경쟁이 있음을 알고 있다. 생존경쟁이란 인간이나 동물이 한 개체로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인 것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동물은 주거·음식물·번식 등에 있어서 좀 더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존경쟁에는 먹느냐 먹히느냐에 약육강식의 경쟁도 있고, 환경에 잘 적응하여 살아남느냐 못 남느냐(적자생존) 하는 따위의 경쟁도 있다. 이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인한 자립적인 힘이 요구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립적인 힘이 없으면 먹히거나 도태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 자립적인 힘이 바로 운명을 좌우하는 힘인 것으로서 ‘운명의 주인’이 지니는 힘인 것이다. 왜냐하면 생존경쟁 그 자체가 길과 흉의 운명을 결판 짓는 경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운명의 주인’이라는 뜻의 자주성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 결코 아니며, 동물에게도 그런 종류의 자주성이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같은 의미로 보더라도 자주성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이 전적으로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주체사상은 왜 이 같은 거짓을 진실인 양 강변하고 있는가? 이것 또한 동물세계에 없는 혁명투쟁이나 계급투쟁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이 투쟁에 관해서도 나중에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② ‘창조성’의 비판
주체사상에 의하면 ‘창조성’이란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11쪽)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창조성도 자주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특성이며, 다만 다른 것은 자주성이 사람의 지위를 표현하는 데 대하여 창조성은 사람의 역할을 표현한다는 것이다.(11쪽)
(ⅰ) 여기서 먼저 창조성의 개념을 개조의 뜻과 연결시키고 있는 데 대해서 검토하기로 한다. 이 창조성의 개념에서 중요한 점은 그 창조성이 ‘목적의식적인 세계 개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세계 개조’이다. ‘창조성’의 상식적인 의미는 창조의 성질 혹은 창조의 능력이다. 즉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을 뜻한다. 창조의 용어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우주 창조나 인간 창조의 표현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새것을 만든다는 의미로 ‘창조’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이것은 또 예술에 있어서의 창작과도 비슷한 개념이다. 이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창작이기 때문에 창조와 의미가 같다.
그러나 개조는 일단 만들어진 것을 다시 고쳐 만드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세계의 개조, 즉 자연의 개조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연을 고쳐 만든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개간사업·간척사업·하역 개발·고속도로 건설·터널 굴착·호안(護岸) 공사 등이 자연개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일들은 자연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일이라는 점에서 개조임이 틀림없다. 또 고속도로의 경우 평지에 도로를 새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창조라고도 말할 수 있어서, 이때는 개조와 창조를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을 하는 능력을 창조성으로 보는 것은 일단 긍정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원료를 취해서 그것에 기계를 가지고 인공을 가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즉 생산하는 것은 개조로 표현할 수 없다. 또 과학자들의 발명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상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각양각색의 발명품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아무리 자연의 원료가 쓰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개조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모두 새로 만들어진 것들로서 어디까지나 창조물들인 것이다. 이러한 생산이나 발명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주된 창조활동인 것이다. 그럼에도 주체사상이 창조의 개념을 주로 개조에만 국한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창조를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으로 표현한 곳도 있기는 하나(11쪽) 그것은 다만 부차적 의미로만 쓰이고 있다.) 주체사상은 이 창조성의 개념을 역사 해석에 적용해서 ‘사회의 개조’(29쪽) ‘사회의 변혁’(28쪽)의 필연성을 도출하고 있다. 심지어 이 창조를 정복이나 투쟁과 같은 의미로까지 사용하고 있다.(28쪽)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요, 배리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은 투쟁이나 혁명이라고 하는 목적을 먼저 세워 놓고, 그 투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본성(본질적 특성)의 하나인 창조성의 개념을 ‘개조’의 뜻으로 규정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ⅱ) 다음은 창조성이 자주성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만 고유한 사회적 속성(10쪽)이라고 한 데 대하여 비판하기로 한다.
창조성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말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 또한 허구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동물 중에도 새것을 만드는 능력(창조성)을 지닌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미나 벌이 그 예이다. 이들은 반드시 집을 짓고 사는데, 개미는 땅 속이나 썩은 나무 속에 집을 짓되, 그들의 조직적인 집단생활에 적합하도록 집을 짓는다. 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도 그들의 조직적 위계적 집단생활과 산란에 적합하도록 그리고 꿀벌의 경우는 꿀의 저장에도 적합하도록 집을 짓는다. 또 까치는 높은 나무 위에 마른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알을 낳기에 적합하도록 둥근 둥지를 짓는다. 거미는 자기의 몸에서 실을 뽑아내어 벌레들이 잘 걸릴 수 있도록 거미줄을 친다. 또 두더지나 들쥐는 살기에 적합하도록 땅굴을 파고 산다.
동물들의 이와 같은 집짓기나 땅굴파기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인간이 살기 위해서 집을 짓고, 사는 데 편리하도록 땅굴을 파는 것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인간의 집짓기와 땅굴 뚫기(자연개조)가 창조의 개념에 포함된다면, 이 동물들의 그것도 당연히 창조의 유형에 포함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주체사상은 이것을 동물의 본능일 따름이라고 하면서, 창조와 구별해야 한다고 할는지 모른다. 본능이란 동물이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공통적인 적응 양식 또는 행동양식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보통 자기보존 본능·종족보존 본능·적응 본능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동물이 집을 짓는 것은 자기가 살기 위한 자기보존 본능에 의한 것이다.
또 그곳에서 자기의 새끼를 낳기 위한 종족보존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서, 동물의 집짓기 굴 파기가 본능임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본능이란 없는 데서 새것을 만드는 그 능력(창조성)을 생래적(선천적)으로 갖고 있다는 뜻인 것으로서 창조성과 관계없는 본능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동물은 생래적으로 창조성을 갖고 있다. 즉 동물의 창조성 그 자체가 본능인 것으로서 창조성과 구별되는 별개의 본능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생물학자나 심리학자들이 인간에게도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의 본능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이 집을 짓는 것을 비롯하여 농사를 짓고 상품을 생산하는 것도 모두 자기보존 본능과 종족보존 본능의 구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본능적 창조성인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동물의 창조성과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다만 인간의 경우에는 생후에 지식과 기술의 습득을 통해서 그 창조성이 동물에 비해서 현저하게 발달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양자의 창조성에 정도 또는 수준의 차이가 생겼을 뿐이다. 동물이나 인간이 생래적으로 본능적인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동물의 창조성과 인간의 창조성이 차원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은, 동물의 창조성은 본능적 창조성이지만 인간의 그것은 본능적 창조성에 이성적 창조성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이 다 함께 창조성을 지녔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주체사상은 이 창조성이 본질적인(따라서 생래적인) 사회적 속성으로서,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닌 억지 주장인 것이다. 왜 이러한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누차 지적한 대로 인간 사회에만 있는 계급투쟁을 ‘창조성’을 가지고 정당화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개념 그 자체는 투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창조를 개조나 정복의 뜻으로 사용하고 드디어는 투쟁과 동일한 뜻으로까지 확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써(28쪽) 분명해지는 것이다.
(ⅲ) 다음은 창조성이 ‘목적의식적’이라는 점에 대해서 검토하기로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체사상은 창조성을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는 사회적 속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11쪽 기타), 여기의 ‘목적의식적’이란 무엇을 뜻하며, 왜 이 말이 창조성의 설명에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목적의식’은 목적과 의식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목적의 뜻과 의식의 뜻을 각각 별도로 알아봄으로써 ‘목적의식’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은 철학사전에 의하면 ‘실천적 의지에 의해서 그 실현이 요구되며, 행위의 목표로서 규정하는 방향’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목적이란 ‘행위에 앞서서 의지로써 미리 세워놓은 그 행위의 목표’인 것이다.
‘의식’의 개념은 철학자에 따라서 그 뜻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나 심리학적으로는 ‘마음이 깨어 있어서 사물을 자각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목적의식’은 ‘자기 행위의 목표를 항상 자각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 ‘목적을 지속적으로 자각하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의식’에 관하여는 다음의 ‘의식성의 비판’에서 다시 다루기로 함).
그러므로 창조성이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운명을 개척하는 속성’이라 함은 ‘창조에 있어서 언제나 창조의 주체는 창조하려는 목표(목적)를 항상 의식하면서 창조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목적의식적으로’라는 말은 ‘목적을 의식하면서’ 또는 ‘목적을 자각하면서’라는 뜻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로서 구태여 언표(言表)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에 목적 없는 창조가 있을 수 없으며, 창조자로서 창조의 목적을 의식하지 않는 창조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창조성의 설명에 ‘목적의식’을 특별히 언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창조성이 인간에게만 고유한 사회적 속성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그러한 창조성을 사람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민대중이 투쟁 목적을 항상 의식하면서 역사를 변혁하고 사회를 개조하게 된다는 역사 이론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목적의식이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주체사상의 이 주장이 또 허구임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동물세계에도 본능적으로 창조성이 있음을 보았다. 즉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을 위해서 집을 짓고 굴을 파는 등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인간과 마찬가지로 창조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에는 목적을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미리 계획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란 요컨대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획의 수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정한 시간에 걸쳐서 계획이 추진되고 실천됨으로써 창조의 목적이 달성된다. 이러한 시간적 과정 없이 창조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창조자는 그 목적을 계속 마음에 지니고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즉 창조자는 그 창조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그 목적을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있어서나 동물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자기 집을 짓는 동안, 앞으로 그 속에서 가족과 함께 살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듯이, 동물도 예컨대 까치가 나무 위에 둥지를 트는 동안, 그 둥지 안에 알을 낳을 것을 의식하고 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른 나뭇가지를 골라서 물어다가 알 낳기에 알맞도록 둥글게 둥지를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알을 낳고자 하는 마음(의식), 즉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의식을 까치가 둥지 짓는 동안 계속 지니고 있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다른 동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으로 창조에 있어서는 인간에게만 목적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동물에게도 목적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목적의식인 창조’가 인간에게만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거기에 다른 저의가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그것은 ‘목적의식’이라고 하는 하나의 명사에 두 가지 의미를 포함시켜서 투쟁과 혁명을 정당화시키려는 저의인 것이다. 즉 이때의 ‘목적의식’은 분명히 투쟁과는 관계없는 것으로서 모든 창조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역사이론에 있어서 같은 용어인 ‘목적의식’을 세계 개조를 위한 목적의식으로, 즉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리하여 주체사상에 있어서는 목적의식이 창조를 위한 목적의식인 동시에 사회개혁(투쟁)을 위한 목적의식이 되고 있다. 그리고 창조성도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 즉 신조(新造)의 능력인 동시에 사회개조(투쟁)의 능력이 되고 있다. 즉 목적의식도 창조성도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논리학의 삼단논법에 ‘매개념 애매의 허위’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예컨대 삼단논법에 있어서 ‘모든 동물은 죽는다.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 고로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정언적 삼단논법은 그 안에 매개념인 동물이 대전제와 소전제에 있어서 같기 때문에 결론은 참이 된다. 그런데 ‘모든 살인자는 사형을 받는다. 사형 집행자는 살인자다. 고로 사형 집행자는 사형을 받는다’는 따위의 삼단논법이 세워진다면, 그것의 결론(‘사형 집행자는 사형을 받는다’)은 확실히 거짓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것은 매개념인 ‘살인자’는 ‘법률을 어기고 살인한 자’ 그리고 ‘사형 집행자’는 ‘법률을 지키고 살인한 자’의 뜻을 각각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적 오류를 ‘매개념 애매의 허위’라고 부른다.
주체사상이 창조·목적의식·투쟁 등의 개념을 서로 연결시켜서 역사관에 있어서의 혁명의 필요성을 합리화시키고 있는데, 그것을 삼단논법으로 논리화시키면 다음과 같이 된다.
대전제 : 창조 활동은 목적의식을 지닌 활동이다.
소전제 : 혁명투쟁도 목적의식을 지닌 활동이다.
결론 : 고로 혁명투쟁은 창조 활동이다.
이 삼단논법에서 대전제의 목적의식(매개념)과 소전제의 목적의식(매개념)이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동일하지 않다. 대전제의 그것은 ‘새것을 만든다’는 뜻의 목적의식이며, 소전제의 그것은 ‘폭력에 의한 개혁’의 뜻의 목적의식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 결론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 즉 이 논법도 역시 ‘매개념 애매의 허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창조성의 설명을 또 삼단논법으로 논리화시켜 본다.
대전제 : 역사상의 모든 계급투쟁은 창조 활동이다.
소전제 : 모든 발명 활동은 창조 활동이다.
결 론 : 고로 발명 활동은 계급투쟁이다.
이것 역시 오류임은 재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체사상이 범하고 있는 이 같은 오류는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고 의도적인 것이기 때문에, 고의적인 ‘개념의 책략’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으로 인간에게만 고유한 본질과 특성의 하나라고 하는 창조성도 결코 인간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본질적 특성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밝혀졌으리라고 믿는다. 즉 ‘창조성’의 개념을 계급투쟁이라는 목적을 합리화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책략적으로 그 뜻을 풀이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물론 논리 베낀 의식성… 과학적 근거 없는 허구
의식이 뇌의 기능인지 아닌지 아직도 미해결… 되레 기능성 부정 늘어
유물론‧관념론 오락가락하는 김일성… 사상적 기회주의자 자인한 셈
③ ‘의식성’의 비판
ⅰ) 의식성의 개념
주체사상은 의식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즉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개조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이다’(11쪽)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철학적으로는 애매한 정의이며, ‘철학 원리’에 합당치 않다. 차라리 사회과학적인 정의라고 봄이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철학적 표현이 되도록 알기 쉽게 요약하면 ‘의식성이란 외계를 인식하고 외계에 대처(실천)하는 데 필요한 속성’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적으로는 의식은 언제나 ‘인식과 실천’에 관련시켜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세계와 자기의 파악’이란 외부세계의 인식을 뜻하는 것이다. 개혁 등을 포함한 활동은 요컨대 외계의 변화에 대한 대처, 즉 실천을 뜻하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의 의식성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결국 주체사상의 의식성은 인식의 능력과 실천의 능력이 복합된 것 또는 인식과 실천의 능력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사람중심론’을 철학이니 새로운 세계관이니 하면서도, 이미 본 바와 같이 주체사상의 가장 중심되는 용어인 ‘사람’ ‘자주성’ ‘창조성’ 등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으며, 그 점에 있어서 이 ‘의식성’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의식’은 고래로 철학이나 심리학에 있어서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에 ‘의식성’이 사람중심론의 주요 개념이라면, 그것이 종래의 의식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밝혔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차이는 밝히지 않고 위와 같이 철학적으로는 애매한 정의만을 내리고 있다.
ⅱ) 의식은 과연 인간에게 고유한 것인가?
그러나 그 정의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면 인식과 실천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의식성’을 비판하기로 한다. 이 비판에서도 의식성이 인간에게만 있는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동물의 외계(환경)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함에 있어서도 의식이 작용한다는 것, 즉 동물에 있어서도 의식작용에 의해서 지각(인식)과 반응(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동물 심리학이 아니더라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위에 말한 집짓기, 굴파기 등은 분명한 목적의식적인 실천의 범주에 드는 행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식물 심리학을 통해서 식물에도 비록 차원은 낮을지라도 의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예컨대 선인장 같은 식물의 잎에 검류계를 부착하고 행한, 인간의 사고나 감정에 대한 것과 같은 반응실험을 통해 식물에 의식이 있음을 확인한 예들이 보고되고 있다. 심지어 원자 내의 소립자에도 의식이 있다는 것이 일부 양자물리학자에 의해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의식성이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왜 굳이 그것이 인간에게만 특유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일까? 이것 또한 인간사회에만 있는 계급투쟁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이 의식성에서 사상의식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내고(31~32쪽 기타), 다시 사상의식에서 계급의식까지를 이끌어 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의식성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물론의 논리를 차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의식성은 사람의 육체적 기관 가운데서도 가장 발전된 기관인 뇌수의 고급한 기능이다. 뇌수는 사람의 생명활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뇌수의 기능인 의식은 사람의 모든 행동을 지휘한다.”(31쪽)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허구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의식이 뇌의 기능인가 아닌가는 아직도 미해결 상태에 있으며, 도리어 기능설을 부정하는 학자의 수가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뇌수 기능인 의식’이 사람의 모든 행동을 지휘하려면 그 의식, 즉 기능은 뇌수(즉 뇌의 운동세포)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능 그 자체가 뇌세포를 지배할 수는 없다. 예컨대 컴퓨터가 아무리 기능이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기능 그 자체는 컴퓨터를 작동시키지 못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제3의 힘, 즉 전원이 연결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뇌기능은 뇌를 지배하지 못하며, 따라서 행동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의식(정신)이 뇌를 지배하고 행동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의식의 기원이 뇌의 기능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뇌 생물학자인 존 에클스·와일더 펜필드 등은 정신(의식)은 뇌의 산물도 기능도 아니며, 도리어 뇌의 상위에서 뇌를 컨트롤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뇌와 정신(의식)의 관계는 컴퓨터와 프로그래머(조작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의식은 인간의 뇌의 기능이기 때문에, 의식성은 인간 고유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주장은 완전히 허위이거나 무지의 소치임을 알 수 있다.
ⅲ) 마르크스의 ‘의식 형태’와의 차이
다음은 같은 공산주의인 주체사상의 의식성과 마르크스주의의 ‘의식’ 또는 ‘의식 형태’가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학비판 서언’에서 “생산 관계의 총체는 사회의 경제적 기구를 형성하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토대가 되고 그 위에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또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는 이 현실의 토대에 대응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의식을 규정한다” “경제적 생산의 제반 조건하에 일어난 물질적인… 변혁과 인간이… 그것과 결전하는 장이 되는 법률·정치·종교·예술 또는 철학의 제(諸) 형태, 한마디로 말해서 이데올로기의 제 형태와 항상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여기서 의식은 물질의 상대개념인 ‘정신’ 및 경제의 상대개념인 ‘이념’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식 형태는 바로 관념 형태, 즉 이데올로기 형태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의식은 사회적 존재(경제)에 의해서 규정되고, 의식 형태인 상부구조, 즉 법률·정치·철학 등은 토대(생산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의식(정신)은 물질을 규정하지 못하며, 의식 형태가 토대를 규정하지 못한다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 주체사상에 있어서는 의식성(곧 정신)은 ‘뇌수의 고급기능’(31쪽)이라고 하고 ‘세계와 자기를 파악(인식)’할 뿐 아니라 ‘세계를 개조 또는 변혁’시키기 위한 ‘모든 행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속성’(11쪽)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의식성이 모든 활동을 규정한다는 말은 마르크스식(공산주의식)으로 표현하면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고, 의식 형태(상부구조)가 토대를 규정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주체사상의 의식과 마르크스의 의식과는 개념상 반대가 됨을 알게 된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볼 때 마르크스의 의식의 개념은 일관성이 있어서 그것의 철학적 개념과 사회적 개념이 일치한다. 즉 의식(정신)이 물질의 산물(철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사회적 물질인 경제, 즉 생산 관계(토대)가 의식 형태를 규정한다(사회적 개념)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의식 개념은 일관성이 없고 전후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철학적으로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유물론의 입장에서 의식(정신)은 뇌수(물질)의 기능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사회에 적용할 때 의식성이 “모든 활동을 규제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의식이 경제 활동, 즉 토대까지도 규정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즉 레닌의 주장과 같이 유물론으로서 정신이 물질(뇌수)의 기능이라고 말하면서도, 이것을 실천적인 면에서 사회에 적용할 때는 토대는 상부구조(의식형태)를 규정한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와 반대로 주체사상은 의식이 토대를 규정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곡절이 있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토대와 상부구조론’, 즉 토대(경제)가 상부구조(정치·철학 등의 의식형태)를 규정한다는 이론에 대한 비판이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에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스탈린 사후, 1956년 2월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 이후에 일어났던 소위 철학논쟁에서 종래의 모순 이론(변증법)과 ‘토대와 상부구조론’에 대해 찬·반 양론이 격렬히 부딪힌 것이다. 그 논쟁 과정에서 의식이 능동적으로 토대를 규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우세를 점해 가고 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철학논쟁의 이 같은 대세에 따라서 우세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이 토대를 규정한다는 것을 표현을 약간 달리해서 ‘의식성이 모든 활동을 규정한다’는 주장을 세워서 그것이 마치 자기의 독창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토대와 상부구조의 문제점이 해결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주장이 스탈린 사후에 비판받은 것은 그 이론이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토대와 상부구조론’을 세운 것은 정신이 물질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원칙을 그대로 사회 현상의 설명에 확대 적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대와 상부구조론이 틀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유물론이 허구임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산주의 이론가들의 딜레마가 있다. 왜냐하면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상부구조나 의식이 능동적으로 토대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시인하려면, 유물론을 포기하고 관념론을 채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관념론을 채택하면 이때까지 관념론을 반동철학이라고 규탄해 온 140년의 공산주의 운동사가 전부 거짓과 속임수의 역사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딱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일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는 일체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런 철학논쟁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철학’인 것처럼 자신의 사상(주체사상)을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실은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상으로 주체사상의 ‘의식성’에 대한 비판을 마친다. 이것으로써 의식성의 이론도 역시 자주성이나 창조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으리라고 믿는다. 아울러 주체사상이 철학상으로는 유물론도 관념론도 아닌 뒤범벅에 불과하다는 것도 밝혀졌을 것이다.
이상으로 (1)의 ‘인간관의 요점과 비판’의 항목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즉 ‘사람중심론’ 자체를 비판하기로 한다.
(2) 사람중심론 자체의 비판
이 항목에서는 몇 개의 소항목을 가지고 사람중심론의 정립 동기·목적·전통적 공산주의에 대한 사람중심론의 위상과 차이점·전통적 인간중심주의와의 관계 등을 다루면서 주체사상의 ‘사람중심론’을 비판하기로 한다.
1) 대안 제시 요건의 결여
주체사상의 사람중심론에 대한 첫 번째 비판의 근거는 그것이 대안 제시의 요건을 전연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주체사상은 사람중심론을 자랑 삼아서 ‘우리 시대의 가장 올바른 세계관’(14쪽), ‘사람중심론의 새로운 철학사상’(9쪽)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사람중심론이 참으로 ‘가장 올바른 세계관’이라면 종래의 모든 세계관은 그다지 올바르지 못한 세계관일 수밖에 없다. 또 이것이 참으로 ‘사람 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이라고 한다면, 종래의 모든 ‘사람중심론의 철학사상’은 주체사상의 사람중심론에 비해 크게 뒤진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사람중심론은 종래의 세계관과 종래의 철학사상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틀림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 제시의 수순을 지켰어야 하는 것이다. 대안이란 기존의 세계관이나 철학의 결함이나 문제점을 지적하고 폭로하여, 그 결함을 보완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는 입장에서 제시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안적 이론이 제시되려면 그에 앞서 종래의 세계관이나 철학사상을 최소한 대표적인 것들이라도 다루어야 한다. 즉 그것들의 요점은 왜곡됨이 없이 공정하게 소개하고 다음에 그것을 만인의 통념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그 뒤에 자신의 입장을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며, 동시에 이러한 내용을 이 사람중심론에 함께 실어야 한다. 그것이 대안 제시의 순서인 것이다.
‘사람(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가들이 연구 또는 명상에 골몰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가 그러했고, 중세에는 서양의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했다. 동양 송나라의 주자, 명나라의 왕양명 등이 그러했다. 근세에는 임마누엘 칸트·게오르크 헤겔, 그리고 특히 인간의 본래적 자기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쇠렌 키에르케고르·프리드리히 니체·카를 야스퍼스 등이 그러했다. 그리고 예수·석가·공자·마호메트 등은 수년간의 명상 또는 기도로써 인간의 참 모습을 깨달아 각자의 종교를 창시한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철학자·종교가가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각자의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에서 최소한 대표적인 몇 명의 인간관이라도 공명하게 소개하여 그것에 결함 또는 미비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폭로해야 한다. 또 자신의 사람중심론이 그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결론짓고, 그것을 주체사상의 이론체계 속에 요점적으로나마 삽입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설득력이 있는 대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러한 수순을 밟지 않았다. 더욱이 안된 것은 그 자신의 대선배요 스승인 마르크스의 인간관조차 다루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청년 시절에 포이어바흐의 자연적 인간관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인간성의 소외 문제를 다루면서 노동자들의 소외된 인간성 회복을 위해 포이어바흐의 인간관을 포기하고 계급적 인간관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주체사상이 사람 중심의 사상이라면 응당 다루어야 할 마르크스의 인간관조차 다루지 않고 ‘우리 시대에 가장 올바른 세계관’이니 ‘새로운 철학사상’이니 하고 있으니, 이것은 결국 ‘나의 사상만이 절대적 진리’라는 유아독존식의 설교이거나 김일성의 신앙의 교리에 불과한 것이지 사람 중심의 사상이나 철학은 아닌 것이다.
2) ‘자유’ ‘이성’ ‘권리’ ‘사랑’을 다루지 않았다
두 번째 비판은 주체사상이 자유·이성·권리·사랑 등의 속성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세계에서는 인류의 통념으로 이러한 속성들은 인간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속성 내지 특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위에 말한 대로 주체사상의 자주성·창조성은 결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아닌 것이다. 또는 인류의 통념상으로도 그것은 인간의 본질로는 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성이나 자유는 인류의 통념상 인간의 특성으로서, 또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속성으로서 인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인간의 속성을 주체사상은 다루지 않고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자유의 문제부터 다루면서 그 이유를 폭로하기로 한다.
① 자유의 문제
주체사상의 사람중심론은 이 자유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인간의 특성은 자유이다”는 말이 없음은 물론이고 “혁명투쟁의 목적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는 말도 없다. 자유의 뜻과 비슷한 해방이라는 말은 몇 군데 있으나 그것도 계급해방일 뿐, 그 계급해방이 개인의 자유를 위한 해방이란 말은 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도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유의 획득 또는 자유의 수호가 인간의 본질적 요구의 하나가 되어 왔음에도 그것을 인간의 속성에서 배제한 이유는 무엇인가? 계급혁명에 의해서 세우고자 하는 사회가 주체사상이 말하는 대로 틀림없이 이상 사회로서의 사회주의 사회라면 그 사회에는 반드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를 ‘자유의 왕국’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자유 없는 사회가 무슨 이상 사회란 말인가?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의 개념을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정치적 자유와 연결시킴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의 추구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란 ‘지배계급에 속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유’의 개념을 전술적으로 이용은 할지언정 자유 그 자체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주체사상도 그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을 위해 자유를 전술적으로 이용할 뿐 자유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속성이다. 많은 소외층은 얻고자 하고 있고 또 많은 시민층은 얻어진 자유를 수호하고 있어서 자유는 인간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관심사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주체사상이 다루지 않는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그 저의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자유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독재에 항거하기 때문이다. 김일성 독재에 있어서도 자유는 그 독재체제 유지에는 가장 큰 방해 요인이 될 것임이 확실하므로 자유를 인간본성에서 제외시켜 버린 것이다.
② 이성의 문제
다음은 이성의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주체사상은 자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성에 대해서도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다. 이성의 뜻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여기서 이성이란 상식적인 의미의 이성으로서 ‘합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실천의 능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뜻의 이성은 자율적인 능력인 동시에 당위성과 자유의지의 터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부터 ‘로고스’라는 명칭으로 이성은 인간의 공통성으로 다루어졌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규정한 이후, 이성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성으로 알려져 왔다.
많은 철학자도 이성을 인간의 본성의 하나로 다루었던 것이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청년 시절의 마르크스도 이성의 자유를 주장한 바 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공산주의자인 모택동(마오쩌둥)도 그의 ‘실천론’에서 인식 과정의 두 단계, 즉 감성적 단계와 이성적 단계 중 이성적 단계에서 전체적·본질적인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성은 분명히 인간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이다. 차라리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인간의 본질에서 제외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성만은 꼭 인간의 특성의 하나로 다루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주성·창조성·의식성도 이성의 작용이 밑받침되어야만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고 능력이나 합리적인 실천 능력이 없이 어떻게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주체사상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 이성을 사람의 본질적 특성에서 제외시키고 동물에게도 있는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인간의 본질로 삼았는데,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사회개혁이나 사회혁명을 정당화 또는 뒷받침하는 데 있어서 이성은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성의 본질은 자유인 동시에 비판성이기 때문에, 이성을 인간본성으로 설정해 놓으면 비판 정신을 공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혁명 과정에서 왈가왈부의 의견 상충이 벌어질 수 있음은 물론, 혁명투쟁이 와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③ 권리의 문제
다음은 권리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이 나면서부터 공통으로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속성으로 권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천부인권이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은 나면서부터 어떤 무엇에도 침해당할 수 없는 자연권 또는 기본권, 즉 자유·생명·재산·안전 등에 대한 권리를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오래도록 믿어 왔다. 이러한 기본권 역시 인간에게만 주어져 있을 뿐 동물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권리 또한 인간 본성의 하나로 다루어져 마땅할 것임에도 주체사상은 이것 또한 본성에서 배제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주체사상이 세우고자 하는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요, 사회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사회주의 사회)는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이름 밑에 공산당(전위당)이 독재하고 더 나아가 일인이 독재하고 있는 사회이다. 요사이 공산국가 내부에 자유민주주의의 방식을 따라서 복수정당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국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만일 실제로 주권재민의 원칙하에 인권이 참으로 보장되어 보통선거가 이루어져서 복수의 정당이 세워진다면 그 때에는 그 사회는 이미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 것이다.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일인독재 사회이며, 주권재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일성 부자의 일인독재체제를 미화시켜서 이것을 유지·강화하여 남한에까지 확대하려는 것이 바로 김일성주체사상 정립의 본래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 개개인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독재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의 사람중심론은 천부인권으로서의 인간 권리는 인간의 본성에서 배제하고 북한의 체제 유지와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에 유리한, 그리고 인간의 일차적인 참된 본질적 특성과는 관계없는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사람의 고유한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④ 사랑의 문제
다음은 주체사상이 인간의 또 하나의 본성인 사랑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에 대해 논하기로 한다. 사랑도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의 사랑은 상식적인 의미의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란 온정과 친절로써 위해 주거나 타인에게 봉사하는 마음 또는 그렇게 하는 일을 말한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애를 베푸는 것, 자녀가 부모에게 효행하는 일, 형제자매가 서로 우애하는 것, 이웃끼리 사랑하고 벗끼리 우의를 나누는 것, 국가에 충성하는 것 등이 모두 이러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미움과 질투·대립과 상충 등 사랑과 반대되는 현상이 있어 온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당사자들에게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다른 요인에 의해 눌리거나 가려져 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고 안 나타나고는 별 문제로 하고, 사랑 그 자체는 인간 누구에게나 본성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속성이다. 모든 종교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주체사상은 사랑을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주체사상의 전체 이론 가운데 사랑에 관해서는 조국애·민족애·동지애·인민애 등의 용어가 몇 군데 보이기는 하나 그 사랑을 인간의 본성으로 다룬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김일성은 당원에게 “인민대중을 위해 적과 싸우라”고만 가르치고 있고 “적을 사랑하라”고는 가르치지 않고 있다. 김일성이 그 자신의 사상(주체사상)을 창시한 목적 자체가 인민대중을 사랑하는 데 있다고는 말하지 않고 “인민대중을 교육하고 조직 동원하여 혁명에 승리할 수 있게 하는 데”(5쪽)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도록 이끌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싸움을 하게 하기 위해 주체사상을 내놓았던 것이다.
결국 주체사상(주체철학)은 인민대중을 사랑하는 데 목적을 둔 사상이 아니다. 또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도록 지도하기 위한 사상도 아니다. 오로지 혁명투쟁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한 싸움의 사상이요, 미움의 철학인 것이다.
그런데 주체사상에도 위에 말한 조국애·동지애·인민애 외에 사랑에 해당하는 개념이 있기는 하다. 겸손함·소박함·너그러움·헌신성·충실성 등이 그것이다. 대중을 이끌어주는 방법으로서 지도자는 언제나 “군중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겸손하고 소박하고 너그러운 품성을 지녀야 한다”(58~59쪽)는 것이 그것이다. 또 혁명적 헌신성(53쪽)·끝없는 충실성(53쪽)·혁명적 동지애(53쪽) 등도 그 예이다. 확실히 겸손함·너그러움·소박함·헌신성·충실성 등의 소위 공산주의식 도덕성은 모두 훌륭한 사랑의 형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서, 예상 외의 사태가 발생하거나 혁명이 끝난 후에는 그런 사랑은 결국 쓸모없는 것이 되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따위의 사랑인 것이다.
일찍이 유고슬라비아의 부통령이었던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는 그의 저서 ‘새로운 계급’에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공산주의 운동처럼 고도의 도덕 원칙을 갖고 헌신적이며 열정적이며 총명한 투사들을 포옹하면서 상승하기 시작한 운동을 역사는 별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사심 없이 애정·동지적 결합·연대심·따뜻하고 곧은 성의를 통하여 굳게 결합돼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완전한 권력과 소유권의 확보를 향하여 등정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런 것은 남김없이 그리고 서서히 소멸되고 익사한다.” 즉 혁명이 끝나면 모든 도덕성은 남김없이 버려진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도덕성이란 단순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공산주의가 사랑이나 도덕을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의미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가 사랑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듯이 종교와 종교가들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모두 사랑의 가르침과 사랑의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와 싸울 때 미국 측의 지원을 얻기 위해 종교를 이용한 바 있다. 즉 종교 탄압을 철회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던 것이다. 모택동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종교인들과 제휴했으며,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도 미군과 싸울 때 불교와 기독교와 제휴했던 것이다.
이용물은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버리게 된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소련의 흐루시쵸프는 종교 탄압을 재개했으며, 일본군을 퇴각시키고 중국 대륙을 장악한 모택동은 극악한 종교 탄압을 재개했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 뒤에는 베트남 땅에서 종교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공산주의자들, 특히 러시아(소련)는 오늘도 세계를 적화시키기 위해 종교를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그 이용 수단의 하나가 바로 해방신학이다.
이 점에 있어서 김일성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불교·천도교 할 것 없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종교를 이용하려 했다. 한국의 일부 종교가들이 이 같은 이용을 당하고 있음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용된 뒤에 닥쳐올 운명이 어떻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상 주체사상이 인간의 본질로서의 사랑을 배제하고 있고, 도리어 인민대중이나 종교의 사랑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데 이용은 이용할 대상이 실제로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용할 수 없다. 공산주의가 사랑을 이용한다는 것은 사랑이 실제로 만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본질적 속성으로서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다루지 않았는가? 그것은 사랑은 본질상 싸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증오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참사랑은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힘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이러한 사랑을 본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공식적으로 사람의 속성으로 인정해 버리면 인민대중은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투쟁을 거부하거나 비협조적이 되어 혁명과업 추진에 큰 지장을 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일성이 사랑을 사람의 사회적 속성의 하나로 삼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실례를 마르크스에서 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마르크스는 청년 시절에 포이어바흐의 자연주의적 인간관을 받아들인 바 있었다. 포이어바흐에 있어서 인간은 신에 의한 피조물이 아니고, 도리어 신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었다. 그런데 포이어바흐가 말한 인간의 본질은 이성·사랑(심정)·의지 등인 것으로서 이것은 동물에 없는 문자 그대로의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인간관을 처음에는 감격적으로 받아들였으나 나중에 이것을 포기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포이어바흐의 인간관으로서는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는 자신의 인간관에 따라서 인간애를 중심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인간애는 기독교의 신적인 사랑은 아니더라도 미움과 싸움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는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립과 투쟁의 철학(유물변증법)을 갖기 시작했던 마르크스에게는 포이어바흐의 인간관은 계급투쟁을 저해하는 반동철학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가 포이어바흐의 자연적 인간관을 포기하고 계급적 인간관을 채택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인간애를 포기하였다는 점에서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으로 김일성이 주체사상에서 인간의 본질 문제를 다루면서도 거기서 사랑을 제외시킨 이유가 명백해졌으리라 믿는다. 여기서 한 가지 첨가하고 싶은 것은 사랑을 거부하고 계급투쟁을 일삼아 온 공산주의가 사회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결국 예외 없이 또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사랑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공산주의 국가의 현황이 이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동시에 현실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종교는 사랑을 근본으로 하는데 이러한 사랑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실 문제의 참된 그리고 완전한 해결을 위한 제3의 대안으로서 참사랑의 사상이 나와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다.
3) 투쟁의 이론적 근거 불(不)제시
다음 셋째의 비판점은 투쟁의 이론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의 마지막 목표는 역사상의 최종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체제를 계급투쟁 및 혁명에 의해 타도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주체사상이 ‘혁명의 주인인 인민대중을 교육하고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하는 진리’(5쪽)로서 내놓은 ‘새로운 철학사상’(9쪽)이요 ‘가장 올바른 세계관’인 이상, 그리고 ‘사회 혁명의 합법칙성을 밝힌 사상’인 이상, 여기에 투쟁이 필연적으로 성립될 수밖에 없는 철학적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제시되지 않은 채 계급투쟁이니 사회혁명이니 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체사상은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8쪽)이니 ‘운동 발전의 합법칙성’(11쪽)이니 ‘자체의 고유한 합법칙성’(15쪽) 등의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것은 이런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이 ‘합법칙성’을 갖추고 있다는 소리다. 즉 ‘법칙에 맞는’ ‘법칙에 일치’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법칙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주체사상은 그 법칙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어디서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논조에 따라서 추리한다면 아마도 그 합법칙성은 '주체의 주동적인 작용과 역할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인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인용문이 그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의 운동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들의 호상작용에 의하여 자연발생으로 이루어지지만 사회적 운동은 주체의 주동적인 작용과 역할에 의하여 발전한다”(15~16쪽). 그런데 여기서 주체는 인민대중이다.
따라서 ‘주체의 주동적인 작용과 역할’이란 인민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의식성에 의한 주동적 작용과 역할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인민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의식성에 의해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이 합법칙성의 내용인 것 같다.
그러나 법칙이란 인간의 의식이나 관념과는 독립되어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인민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의식성에 의한 사회 발전은 관념론적 요소에 의한 사회 발전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객관성을 가질 수 없게 되므로 법칙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제3자의 추측일 뿐이며 주체사상이 밝힌 것은 아니다. 즉 주체사상은 ‘발전의 합법칙성’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여기에도 뭔가 저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스탈린의 경우에는 그 법칙을 제기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판 서문에서 “이 법칙 그 자체가 철의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한다”고 하면서 법칙에 의한 계급투쟁의 필연성과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몰락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제2판 후기에서 그 법칙이란 바로 변증법(유물변증법)임을 밝히고, “나의 변증법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이다”고까지 해명하고 있다.
그런데 김일성은 합법칙성에 의해서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이 필연적이라고 하면서도 그 법칙이 무엇인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 법칙은 반드시 주체사상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철학적 원리’에서 제시되고 있어야 한다. 즉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사람의 사회적 속성은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이다”고 하는 ‘철학적 원리’ 속에 투쟁의 논리적 근거(법칙)가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계급투쟁의 논리적 근거는 그의 유물변증법이었다. 자연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는 모순에 의해 발전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사회의 발전도 자연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발전이기 때문에 변증법적 발전(즉 모순에 의한 발전)이 아닐 수 없으며, 그 사회적 모순이 바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과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의 이론 전개는 논리적이어서 이론 전개방식에는 오류가 없다. 마르크스 이론의 오류는 논리전개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물변증법 자체에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론 전개를 논리학의 삼단논법에 맞추어 보면,
대전제 : 자연의 발전은 물질적 발전이며, 따라서 변증법적 발전(모순에 의한 발전)이다.
소전제 : 사회 발전은 물질적 발전이다.
결론 : 고로 사회 발전은 변증법적 발전(모순에 의한 발전)이다.
가 되어서 삼단논법(정언적 삼단논법)에 들어맞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흠이 없으며, 결론은 참이 된다.
그러나 김일성은 투쟁이론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무런 논리적 근거 없이 계급투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체사상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사람의 사회적 속성은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이다”는 사람중심론이다. 이 사람중심론에서 아무런 논리적 근거 없이 단번에 “인민대중은 역사의 주체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며, 인민대중은 자주적인 투쟁·창조적 투쟁을 전개하며, 이 투쟁은 혁명적 사상의식, 즉 계급의식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민대중의 ‘인민’은 자유민주주의의 인민의 개념과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계급성을 전제로 한 근로인민대중이며 피지배계급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사람’의 개념을 역사 발전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합리적 이유도 없이 계급성을 띤 인민대중으로, 즉 피지배계급으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다.
사람(인간)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자연인일 뿐 계급인도 아니며 직업인도 아니며 종족인도 아니다. 계급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사람’ 그 자체는 비계급인 또는 초계급인인 것이다. 역사를 설명할 때 그러한 인간을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계급적 인간인 인민대중으로 고쳐서 다루고 있다. 그 때문에 피지배계급이 아닌 많은 인간층은 역사 무대에서 역할이 배제되고 말았다.
피지배계급은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에 지배계급(착취계급)에 대하여 적대관계에 서게 된다. 그리고 계급적 이익을 위해서는 부득이 투쟁을 전개한다. 그런 다음 드디어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결론이 세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의 사회적 속성인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은 인민대중의 계급투쟁 과정에서 투쟁적 성격을 띠게 되어 자주성은 투쟁을 위한 자주성이 되고, 창조성은 투쟁하는 창조성이 되고, 의식성은 혁명의식이나 계급의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주체사상은 투쟁의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변명할는지 모른다. 즉 “자연인으로서의 ‘사람’의 속성은 계급성을 띠고 있지 않으나, 역사 발전이나 사회 발전에 있어서 ‘사람’은 역사적·사회적 존재가 되어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계급성을 띤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주인)가 될 수밖에 없다(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는 반동적 착취계급이기 때문에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16쪽) 따라서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은 투쟁을 위한 속성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논리의 비약이요, 억지주장이다. 사람(인간)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인이다. 그 자연인이 성장하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각양각색의 직업인 종교인·사상인·정치인·계급인 등의 현실적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적으로는 인간이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사람은 자연인으로서의 측면을 예나 지금이나 다 갖고 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옷을 벗으면 만인이 전부 자연인으로서의 육신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인간의 속성인 자주성·창조성·의식성도 마찬가지이다. 이 자연의 인간, 자연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계급이 없던 원시시대나 계급이 생겨난 후나 또 앞으로 계급이 사라진 후에도 그 자연인과 그 속성은 불변인 것이고, 또 불변이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자연인이 역사발전에 있어서는 계급적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해 보았자 그것은 억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또 주체사상은 계급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으며 마치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지배계급의 압제와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즉 숙명적으로 피지배계급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숫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일부 근로자나 노동자는 스스로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오늘날 한국의 모모 기업가들이 그 좋은 예인 것이다.
주체사상의 주장대로 한다면 이러한 기업가들은 과거에 근로인민이었던 시대에만 사람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인정될 수 있고 자주성·창조성·의식성도 사회적 속성으로서 인정될 수 있으나 기업가가 된 뒤에는 그가 비록 그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가지고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에도 단지 근로인민이 아니라는 조건 하나 때문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으로 인정될 수 없고 또 그가 지닌 속성도 인간의 사회적 속성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이 도출된다. 바로 이런 면에서 사람중심론의 투쟁은 이론적 근거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계급투쟁의 이론적 근거는 계급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고 계급 대립에 있다고는 볼 수 있어도 인간의 속성에 있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사회가 계급사회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계급과 관계없이 언제나 자연의 사람인 것이며,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살아서 작용한다. 따라서 투쟁의 논리적 근거를 찾는다면 사회의 계급적 모순에서 찾아야 할 것임에도 김일성은 투쟁의 논리적 근거가 마치 인간의 본질적 특수성에 있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그런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투쟁이 성립되는 사회적 근거일 뿐 철학적 근거가 아니며, 뿌리로서의 근거도 아닌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사상의 출발점인 그의 철학(유물변증법)에 철학적인 근거가 있었던 것처럼 김일성의 경우에도 주체사상의 출발점인 철학적 원리 속에, 즉 사람중심론에 투쟁의 철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사회적 근거는 결코 철학적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사회적 근거를 마치 철학적 근거인 것처럼 바꿔치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대중만이 역사 발전의 주체라는 주장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또 계급투쟁에 참가하는 사람이 반드시 인민대중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실지로 계급투쟁의 지도자 중에는 근로인민대중이 아닌 계급에 속한 사람도 많았다. 그것은 폭력혁명으로써 사회주의를 세운 공산주의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다. 또 아무리 계급사회에 모순이 많다 하더라도 폭력혁명만이 그 개혁의 유일한 방법이 결코 아닌 것이다.
역사적 발전의 주체는 누구든지 될 수 있다. 사람으로서 유능한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 본질적 특성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또 실제로 되어 왔던 예가 많다. 우리는 수많은 과학자·사상가·예술가·종교지도자가 과학의 발전·경제의 발전·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 있음을 알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중간계급 내지 상류계급에 속해 있었으며 반드시 근로계급은 아니었다.
사람 중심 철학 외면한 주체사상… 자유‧이성도 배제
사람이 본질로서 사랑도 배제… 종교의 사랑조차 목적 위해 수단화
사랑의 본질은 용서… 혁명과업 차질 올까 두려워 본질적 속성 배척
4) 철학의 부재성
다음 네 번째의 비판점은 철학의 부재성이다. 여기서는 김일성주체사상에는 엄격히 말해서 철학이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주체사상을 ‘새로운 철학사상’(9쪽)이요, ‘우리 시대의 가장 올바른 세계관’(14쪽)이라고 자찬하면서 그 주요 내용을 ‘철학원리’라는 항목하에 적고 있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인간학에 불과하다.
주체사상은 ‘사람 중심의 철학’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원리’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좋게 보아서 인간의 본성과 지위와 역할을 다룬 인간학으로서의 철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학은 일반철학 중에서 극히 제한된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대표적인 철학 부문도 아니다. 철학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세계와 우주의 근본원리와 일반적 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철학의 대표적인 분야는 자연과 우주의 일체 존재의 근본적 규정성을 다루는 본체론(존재론)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철학이 특히 자연과 우주를 다루기 때문에 동일한 대상(자연과 우주)을 다루는 과학적 진리와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 또 철학은 객관세계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인식론적 논리학적 측면을 갖추어야 한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철학이라고 자칭하면서도 이러한 철학의 조건들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이에 대하여 밝히기로 한다.
① 주체사상에는 고유한 본체론(本體論)이 없다
이미 말한 것처럼 본체론은 우주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입장이다. 본체론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유물론이요, 또 하나는 관념론이다. 유물론은 우주 만유의 궁극적인 본체는 물질이라고 믿고, 정신은 이 물질에서 파생된 이차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관념론은 우주만물의 본원적 존재를 정신·이성·의지 등으로 보고 만물은 다만 관념의 표현 형태 또는 표상의 복합체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전자의 예로는 그리스 유물론·기계론적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이 있다. 그중 변증법적 유물론은 공산주의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적 유물론이기도 하다. 후자의 예로는 플라톤·헤겔이 주장한 객관적 관념론과 조지 버클리·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 등이 있다. 마르크스나 레닌은 이 관념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주체사상에는 이러한 본체론에 대한 독창적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주체사상에는 ‘사람은 물질적 존재’(9쪽)이며 ‘사람은 물질세계 발전의 특출한 산물’(9쪽)이라고 하면서 유물론을 일단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김일성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래에는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의 관계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아 왔다. 물질의 일차성·존재의 일차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원리는 이 문제에 과학적 해명을 주었다.”(74쪽),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도 자연과 같이 물질세계에 속하며, 물질세계 발전의 일반적 합법칙성에 따라 변화 발전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사회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견해를 타파했다”(76쪽) “사람이…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상은 신비주의와 숙명론을 부인한 유물론적 입장을 전제로 한다”.(75쪽)
이것으로 주체사상이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그리고 변증법까지)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의 사상을 ‘새로운 철학사상’ ‘가장 올바른 세계관’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이상, 마르크스주의 유물론보다 더 ‘새롭고’ 그보다 더 ‘올바른’ 독자적인 세계관 또는 본체론을 내놓아야 한다.
또 실제로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그 당대에는 필요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적합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의 필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의 출현은 당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73쪽), “(그런데) 시대의 발전은 세계관의 발전을 동반한다”(73쪽), “노동 계급을 비롯한 노동인민대중이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새 시대는…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을 요구하였다”(74쪽).
이리하여 오늘날에 맞지 않게 된 마르크스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내놓은 것이 자신의 주체사상이라는 것이다. 즉 “이 역사의 과제는 주체사상이 창시됨으로써 빛나게 해결되었다”(74쪽)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적 과제를 빛나게 해결하였다”는 주체사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결하였다는 것인가? “주체사상은 사람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보면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새롭게 밝혔다”(74~75쪽), “주체사상은 세계의 시원(始元) 문제가 유물론적으로 밝혀진 조건에서 세계에서의 사람의 지위와 역할문제를 철학의 근본 문제로 새롭게 제기하고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주었다”(74쪽)는 것이며 “주체사상에 의하여 사람은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인간에 대한 완벽한 철학적 해명이 주어지게 되었다”(75쪽)는 것이다. 즉 사람중심론에 의해 철학의 역사적 관계가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철학상, 특히 본체론에 있어서의 김일성의 입장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은 ‘당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일 뿐이고 오늘날엔 맞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 맞는 세계관으로서 ‘사람중심론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내놓은 것이 주체사상이라고 했으니 그는 유물론적 입장을 떠나서 순수한 ‘사람 중심’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면 관념론에 대해서 주체사상은 어떤 입장인가? 물론 관념론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주체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이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여(73쪽)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타파한 사실(73쪽)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김일성의 입장은 유물론의 입장도 아니며 관념론의 입장도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람중심론이 과연 세계관이냐 하는 문제이다. 주체사상은 분명히 유물론도 관념론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중심론을 새로운 세계관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되느냐 하면, 세계관 자체가 유물론이나 관념론과 같은 본체론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은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② ‘사람 중심’이 과연 세계관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김일성주체사상의 사람중심론은 단순한 인생관이나 인간관일 뿐이다. 세계관이란 세계에 대한 관점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포함한 전 우주에 대한 통일적인 해석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계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은 우주의 궁극적 실체(본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루는 본체론이다. 따라서 본체론이 없는 세계관은 엄격한 의미에서 온전한 세계관이 아닌 것이다.
김일성이 진정으로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고 싶었다면, 먼저 새로운 본체론 즉 새로운 유물론을 제시했어야 한다. 마치 마르크스가 당시에 유물론(기계론적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이 ‘당대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요구에 맞는 유물론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시한 것처럼, 김일성도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을 전제’(75쪽)로만 하지 말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서 더 나은 새로운 본체론을 세워 그것을 터로 하고 사람중심론을 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본체론을 세우는 데 있어서 유물론을 완전히 포기하고 관념론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다음과 같은 논조로 보아 그가 정식으로 관념론을 채택할 리는 만무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이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세계의 개조자(改造者), 자기 운명의 개조자라는 사상은 관념론이나 형이상학과는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그는 아무리 ‘새로운 철학원리’를 냈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자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에, 오래도록 ‘반동철학’으로 취급받아 오던 관념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은 명백한 일이다.
여하간 김일성은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함에 있어서 먼저 새로운 본체론, 즉 새로운 유물론(예컨대 ‘신변증법적 유물론’ 같은 것)을 정립하고 그 터 위에서 그 본체론에 맞도록 사람중심론을 세웠다면, 문자 그대로 사람중심론은 새로운 세계관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그가 독창적인 본체론을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람중심론은 결코 온전한 세계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사람중심론을 굳이 새로운 세계관이라고 우겨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중심론이 엄연한 본체론을 터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의 공산주의의 인간관·사회관·역사관이 모두 본체론(유물론)을 터로 하고 있듯이, 김일성의 인간관·사회관·역사관도 김일성 고유의 본체론에 입각한 사람중심론을 터로 하여 성립돼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읽어 보면 뭔가 새로운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보다도 더 나은 유물론을 터로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더욱이 과거의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 변증법과 형이상학의 투쟁의 역사였다”(72~73쪽)고 규정하고, 그 투쟁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유물론과 변증법의 승리를 확정하였다”(73쪽)고 밝힌 뒤에 그 승리한 ‘유물론적 변증법적 입장을 전제’로 하고 사람중심론을 세웠다(75쪽)고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람중심론 속에는 더 나은 새로운 유물론·새로운 변증법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측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주체사상에서 새로운 유물론이란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다. 김일성 자신이 ‘새롭게 제기된 철학의 근본문제’는 본체론의 문제, 즉 세계의 시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주인의 문제라고까지 말하면서(74쪽), 본체론의 문제는 이미 끝났기 때문에 새로이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뜻조차 비치고 있다. 왜냐하면 시원의 문제는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해명을 주었기”(74쪽)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질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 즉 정신이 물질의 산물 또는 기능이냐, 물질이 정신의 산물이냐의 문제 같은 시원의 문제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으로써 과학적으로 해명되었다는 것은 김일성의 또 하나의 허언이다. 이때까지 어느 과학자도 정신이 물질의 산물임을 확인한 일이 없었다. 도리어 어떤 과학자, 예컨대 세계적인 뇌 생물학자 에클스는 정신이 뇌세포의 산물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뇌세포의 상위에서 뇌세포를 컨트롤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김일성의 위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사람중심론을 세우면서 실은 관념론을 감쪽같이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주성·창조성·의식성 등 소위 인간의 사회적 속성은 실은 유물론을 터로 하고는 결코 성립할 수 없으며, 관념론을 터로 하고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자주성·창조성·의식성 중에서 특히 의식성을 중요시한다. 그것은 “의식성에 의존하여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자주성·창조성이 담보(보장)된다”(11쪽)는 말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의식’의 문제는 정통 공산주의에 있어서는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로 남겨진 부분이다. 그것은 이미 ‘의식성’ 비판에서 말하였듯이 마르크스가 유물론에 입각해서 정신이 물질의 산물인 것처럼, 의식 형태를 물질적 조건의 산물로 규정하고 물질적·사회적 조건이 의식 형태를 규정할 뿐 의식 형태는 물질적·사회적 조건을 규정하지 못한다고 단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경제학비판 서언’에 있는 ‘토대와 상부구조’에 관한 이론이다. 이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른다면, 의식이 토대인 물질적·사회적 조건을 능동적으로 개조하거나 개혁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유물론적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의식이 언제 어디서나 사회적·물질적 조건을 개조하거나 개편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유물론적 입장이 아니라 관념론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일찍부터 그들의 실천을 통해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달리 의식이 능동적으로 토대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즉 그들은 혁명가가 사상의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사회적 조건을 개혁하고 물질적 조건을 개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유물론보다는 관념론이 더 참임을 시사하는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그동안 이 사실을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가슴에 품고만 있다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있은 뒤 드디어 터뜨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대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철학논쟁으로 알려진 것 중의 ‘토대와 상부구조’ 논쟁이다.
이와 같이 의식이 능동적으로 개조와 개혁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정신이 물질의 산물이 아니라 도리어 물질이 정신의 규정을 받는다는 관념론을 수용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의식성’과 그것에 보장되고 있는 ‘자주성’ ‘창조성’ 등의 개념을 가지고 자연개조·사회개혁·혁명 등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가 관념론의 입장에 서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김일성의 사람중심론은 겉으로는 유물론인 것 같지만, 실은 관념론적 요소가 대폭 수용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온전한 유물론도 아니요 온전한 관념론도 아닌 양자의 뒤범벅(혼합)인 것을 자신의 독창인 것처럼 꾸며놓은 것이 김일성의 소위 ‘새로운 철학원리’라는 것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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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다니엘
2025-03-2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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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는 이론보다 현실적인 내용을 사실을 바탕으로한 것을 기사로 실어 이론으로 비판한 것을 실어야 현실 공감이 되어 독자의 기쁨 보람을 준다. 예로 이재명이나 문재인이나 박선원이나 우원식등등 사회적 국가적 지명도 높은 사람이 왜 공산주의 허구에 빠져 대한민국을 국가적 위기로 몰아 넣는지, 친중 친북 반미 반일 등 국가 안보외교를 정치인들이 어떻게 국가 경영을 해야 하는지를 사실 실체를 바탕으로 실어야 현실공감을 얻는 기사가 된다
마른닢
2025-03-24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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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누가 읽나? 빨갱이가 무서운건 온갖좋은말을 다 쓰면서 행동은 정반대로 하는 거짓선동이 가장 큰 특징인 역장수들이다. 약팔고 잡아온 사람들을 노예로 다루는게 그 악마들을 특기!
완전 논문이네
2025-03-24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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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기사가 아니라 완전 논문이잖아 이건 신문에 게재할 것이 아니라 논문집에 실어야지 글쓴이가 신문 기사와 논문 글을 구분 못하나 봅니다. 논문 식 글을 통해 자신이 북한학 박사임을 은근히 내세우고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