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7일 일요일 아침 7시48분,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미국 하와이 제도 오아후섬에 위치한 미 태평양 함대 기지 진주만(Pearl Harbor)을 기습 공격했다. 진주만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전함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이에 비해 일본군 사망자는 64명에 불과했다. 진주만 공격은 일본의 대성공이었다. 반면 미국인들에게 이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되고 있다.
Z작전으로 명명된 진주만 공격을 입안하여 실행 한 것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 해군 제독이었다. 야마모토는 1904년 일본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1919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하며 미국의 잠재력과 막강한 국력을 확인했고 1925년 주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현장에서 미군에 대한 정보 활동을 경험했다.
Z작전의 전개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미국은 거듭되는 영국 등의 참전 요구를 거부하고 중립적 자세를 취했다. 다만 일본에 대해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과 석유 수출의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운하 통과 거부 등 경제 제재를 단행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어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태평양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전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직시하고 이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과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야마모토는 초기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에서 유학·무관 생활을 하면서 미국의 기술력과 경제력 등 막강한 잠재력을 확인한 터라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적 제재가 계속되자 이를 돌파하기 위해선 어차피 미국과 싸울 것이라면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야마모토는 1940년부터 본격적으로 Z작전을 준비했다. Z작전의 Z는 러일전쟁 당시 전투 의지를 독려하기 위해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는 의미의 국제 신호코드인 Z깃발을 게양하여 승리한 데서 연유한다. 이후 Z 깃발은 일본에서 승리를 염원하는 상징이 되었다. 야마모토는 Z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전에 철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을 진행했다. 진주만 공격은 일본군이 수개월에 걸쳐 정보 수집, 계획 및 조율, 훈련 과 예행연습, 그리고 기만 등 치열한 전략 수립에 쏟은 광범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진주만 공격 직전, 일본 스파이 네트워크는 미 태평양 함대의 움직임과 취약점을 낱낱이 감시하며 계속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모리무라 타다시(森村 正)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 부영사와 일본에 고용된 독일 정보요원 버나드 쿤(Bernard Julius Otto Kuehn) 등 스파이들의 활약이 큰 역할을 했다.
외교관으로 위장한 다케오 요시카와
1941년 3월27일, 화와이 호놀룰루의 영일(영국·일본)신문 ‘닛푸지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현지 일본 총영사관의 신임 영사로 임명된 모리무라 타다시가 오늘 아침 닛타 마루호를 타고 일본에서 이곳으로 왔다. 그는 귀국 신청 및 기타 사안을 신속 처리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하고 있는 일본 외국인 등록부에는 모리무라 타다시라는 인물이 없었으나 그 누구도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모리무라 영사의 본명은 다케오 요시카와(吉川 猛夫, 1912년생)였다. 그는 1933년 일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어 해군 비행사 훈련을 받던 중 심한 위장병을 앓아 1936년 제대했다. 이후 해군 정보부 제3부에 소환되어 스파이 및 정보 수집에 대한 광범위한 훈련을 받고 미국 해군을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되었다. 그는 미 해군과 관계되는 현지 무관의 보고서, 전 세계 요원의 비밀 보고서, 심지어 뉴욕 타임스의 군사 담당 편집자인 핸슨 볼드윈의 군사 평론 등 각종 간행물까지도 섭렵했다. 1940년에는 일본 해군 정보부에서 기장 뛰어난 미 해군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해군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략적 사고에 의존해 잠재적인 적의 행동을 예측하고 보고했다.
1940년 8월 요시카와는 해군 동료들에게도 비밀로 여행객을 가장해 하와이로 파견되었다. 그는 하와이 제도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열심히 공부했고, 민간인들과 더 잘 어울리기 위해 머리를 길게 길렀다. 그는 진주만에 있는 미국 함대의 활동과 이동을 감시하고 오아후와 다른 하와이 제도에 있는 미군기지에 대해 탐지하고 복귀했다.
사전 준비를 마친 요시카와는 1941년 3월 모리무라 타다시(森村 正)라는 이름으로 하와이 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했다. 그는 자신의 외교적 지위와 하와이에 거주하는 많은 일본계 거주자들 틈에서 의심받지 않고 활동했다. 그는 부영사로 위장한 외교관 신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보 수집에 진력하며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정보수집 활동에 바쳤다. 일과를 마치고 영사관으로 돌아와 도쿄로 보낼 암호 전문을 작성한 다음에는 저녁 식사와 휴식 시간에도 주변인과의 교류를 위한 활동을 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반복했다.
요시카와는 외교적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정찰 활동을 확대했다. 그는 여러 명의 여성과 동행해 관광객 행세를 하며 여러 차례 항공기를 임대해 미 함대의 움직임과 지형을 관찰했다. 알레와 고지대에 있는 슌초로(Shuncho-ro)라는 일식당은 미 함대의 배치 및 운용을 정찰할 최적의 관측 장소였다. 그는 그곳에서 함대 배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낮과 새벽의 패턴을 관찰할 수 있었다.
요시카와의 정보 수집에는 수영 실력도 한몫을 했다. 그는 섬의 해변을 따라 수중 관측을 하며 수중 장애물, 조류, 그리고 해변 경사도를 기록했다. 또한 불교 모임에 참석해 지역사회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하와이에는 16만 명의 일본계 이민자와 체류자들이 있었음에도 요시카와는 보안을 위해 철저히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그의 정보는 광범위하고 상세했다. 1941년 4월부터 12월까지 도쿄에 보낸 그의 보고서에는 진주만에 주둔한 함선의 수와 기종 등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여러 섬 비행장의 항공기 현황과 방벽, 풍선, 방어 준비 상황도 파악했다.
요시카와는 정보를 도쿄로 전송하기 전 ‘J-19 외교 전문’으로 암호화해 송신했다. 하지만 영사관에 단파 송신기가 없었기 때문에 호놀룰루 시내에 사무실을 둔 두 개의 상업 회사인 맥케이 라디오 앤드 텔레그래프와 라디오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RCA)를 통해 전송했다. 영사관의 운전기사가 전송할 전문을 전달했다. 일본은 미국 정보기관이 1940년 여름부터 J-19 암호 해독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미국 정보요원은 두 회사를 압박하여 도쿄로 전송되는 메시지를 파악했다. 1941년 9월24일 도쿄로부터 호놀룰루 영사관에 이른바 ‘폭탄 음모’(진주만 폭격 관련, No 83)로 알려진 전문이 하달됐다. 이 전문엔 진주만 공격 작전 수행에 관한 97개의 세부 질문 목록이 수록돼 있었다. 요시카와는 이에 충실히 답했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 두 달 전인 10월9일에 이른바 83번 전문을 해독했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진주만 공격이 끝날 때까지 이 전문을 다 읽지 못했다. 워싱턴에 있는 미국 전쟁부는 일반적으로 도청·해독된 전문을 현장 지휘관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일본의 암호전문에서 얻은 정보를 너무 많이 공유하면 일본군의 암호가 해독되었다는 사실이 누설될 수 있다는 우려 탓이었다.
1941년 12월7일 오전 1시 20분,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인 항공모함 아카기호 함교에서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받았다.
“항구에 정박 중인 함선: 전함 9척, B급 순양함 3척, 수상기 모선 3척, 구축함 17척. 입항하는 함선은 B급 순양함 4척, 구축함 3척입니다. 모든 항공모함과 중순양함은 출항… 미 함대에 변동이나 특이 사항은 없음.”
나구모는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함대를 격파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개시할 기동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문은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 암호실에서 보내온 수많은 전문 중 마지막 전문이었는데 공격이 시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수신되었다. 공격 당일 일본 연합함대는 도청을 피하기 위해 무전마저 끊었다.
도라, 도라, 도라!(トラ, トラ, トラ!)
오전 7시53분 비행 총대장의 명령으로 후방 전신석에 앉은 통신사 미즈기 토쿠신이치 1등 비행병조장은 진주만 기습에 성공했다는 암호 ‘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를 사령부에 급전했다.
6척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353대의 일본 항공기(전투기·수평폭격기·어뢰폭격기 포함)는 진주만 기지를 마음껏 유린했다. 당시 보유하고 있던 8척의 미 해군 함공모함 중 4척이 침몰당하거나 손상되었다. 일본군은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대공훈련함 1척 등을 격침 또는 손상시켰다. 188대의 미군기가 파괴됐고 민간인 83명을 포함해 2403명이 숨지고 1178명이 다쳤다. 다행히 발전소·드라이독·조선소·정비시설·연료어뢰저장시설 등 중요한 기지시설, 잠수함 잔교, 정보부대의 본거지인 본부 빌딩은 무사했다. 반면 일본은 29대의 항공기와 5척의 잠수함을 잃었고 64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FBI 체포 작전
FBI 요원들은 진주만 공격을 당한 직후인 1941년 12월7일 오전 9시30분경 요시카와를 비롯한 호놀룰루 일본 총영사관 직원들을 즉각 체포했다. 직원들은 10일간 영사관에 감금된 후 미 본토의 샌디에이고로 이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942년 2월 말 텍사스 캐년 근처 외딴 트라이앵글 T게스트 랜치로 이송되어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으나 요시카와 등은 스파이 활동을 전면 부인했고 미국 측에선 결정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집요한 추적으로 진주만 공격 관련 일본 스파이망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요시키와는 1942년 8월 미국과 일본과의 외교관 포로 교환 결정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해군 정보부에 복귀해 근무했다. 요시카와는 전쟁 중 자신의 공로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안 때문이었다. 그가 호놀룰루 주재 일본 정보기관의 수장이라는 사실은 1950년대에 드러났다. 퇴직 후 1955년 잠시 사탕 사업을 시작했지만 망했다. 1963년 요시카와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저술했다. 2020년 그의 회고록은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요시카와는 세상 밖으로 사라졌고 1993년 사망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요시카와의 정보활동은 1941년 12월7일까지 이어진 일본의 성공적인 정보 수집 작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가 제공한 정보는 거꾸로 역사의 흐름을 형성하여 미국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케 했다. 진주만 공격 성공은 요시카와 외에도 본토 미군 시설에 침투해 암약한 해리 T. 톰슨과 존 S. 판스워스 같은 다른 요원들도 한몫을 했다. 그들의 보고서는 하와이에 있는 다른 요원들의 보고서와 결합돼 진주만 공격의 전략적 결정과 작전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에 의해 고용된 독일 정보요원 버나드 쿤 등 스파이들의 활약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의 활동상은 다음 호에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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